아일랜드 여행기 7. 네버랜드로 걸어 들어간다.

“네버랜드로 걸어 들어간다.”

피터 팬은 내일이면 어른이 된다는 웬디의 이야기를 듣고 네버랜드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네버랜드는 시간이 멈춰 있어서 웬디가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웬디와 그의 동생인 존, 마이클은 좋다고 소리쳤고 피터 팬은 팅커벨에게 요정가루를 뿌리게 해서 웬디와 그의 동생들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날아갔다. 시간이 멈춰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섬이며, 행복한 상상을 하면 날 수 있는 섬인 네버랜드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공간이다.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꿈의 동산이며 영원히 동심으로 살 수 있는 순수한 섬, 그런 땅이 어디에 있는가?

하이랜드(Highland)로 향하며 네버랜드를 꿈꿨다. 그건 스코틀랜드인의 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사람들은 하이랜드를 네버랜드라고 믿는다고 한다. 하이랜드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을까? 여행하는 동안 나의 시간도 멈춰 있을까? 시간이 멈추어서인지 나의 시계도 고장이 나서 벗어 버렸다. 정말 시계가 필요없는 공간인가 보다.

글렌코 계곡

글렌코 계곡

하이랜드의 중심지는 글렌코(Glencoe)다. 글렌이 게일어(켈트의 옛 언어이자 아일랜드어)로 계곡이라는 말이니 글렌코로 가는 길을 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계곡이 범상치 않다. 거대한 빙하 계곡이며 하이랜드를 둘로 나누고 있다. 5억 년 전부터 형성된 고원을 빙하는 깊고 예리하게 깎고 지나갔고 고원은 무참히 깎여 산과 계곡이 되었다. 그래서 글렌코로 이어지는 빙하계곡을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길이라고 부른다.

10월 초여서인가 글렌코 계곡은 초록의 옷을 벗어버리고 붉게 물든 양치식물과 꽃망울이 떨어진 채 황갈색을 띠는 헤더로 들판이 누렇다. 초록이었으면 답답했을 텐데 황갈색으로 변한 계곡과 산록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원한 청량감과 계절의 스산함을 느끼게 된다. 글렌코 계곡은 하이랜드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하 계곡이다. 15km에 걸쳐 펼쳐져 있으며 계곡 양옆으로 1,000m 가까운 산봉우리를 도열시켜 놓아 빙하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한다. 얼마나 힘차게 산을 긁었으면 산이 수직으로 절개된 채 두리번거리고 있을까.. 마이클 브라이트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을 꼽았는데 글렌코가 그 목록에 들어가 있는 걸 보면 빙하계곡의 여왕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다. 너무 아름다워 세 자매 봉(Three Sister Rock) 앞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1시간 걸었다.

세자매 봉

세자매 봉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좋지만 황토빛 계곡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007’의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은 제임스 본드라는 불사조를 만들면서 그를 글렌코 출신이라고 써넣었다고 한다. 작가의 뇌리에 글렌코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땅으로 기억되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혹독한 땅의 단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글렌코 계곡은 ‘비극의 계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건 1692년 2월 13일 킴벨가문 군대에 의해 맥도널드 가문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 통합왕조의 두 번째 왕인 제임스 2세를 스코틀랜드 사람은 열렬히 지지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신교 귀족들은 제임스2세를 몰아내고 하노버의 오렌지 공작을 왕으로 맞아들였다. 새로이 정권을 잡은 세력은 스코틀랜드가 저항하지 못하게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 희생물이 맥도널드 가문이었다. 그날 킴벨가문 군대의 학살을 피한 사람들은 글렌코 계곡에 숨어들었지만,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얼어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겐 피의 계곡이자 한의 계곡이 아닌가…

스코틀랜드의 또 다른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도 하이랜드에 근거지를 두고 잉글랜드와 대적했다고 하니 잉글랜드의 입장에서 하이랜드는 골치 아픈 땅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워스트 하이랜드(west high land) 트레킹은 *Old Military Road라고 불리는 길을 따라 이어진다. 산 허리 자락을 따라서 만들어진 산길이 글래스고에서부터 포트 윌리엄까지 이어지고 이 길이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West Highland Way)의 주 트레일이기 때문이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weat highland way)는 글래스고 외곽의 밀른게이브(Milngavie)에서 시작해서 포트 윌리엄(Fort William)까지 154.5km에 걸쳐 하이랜드의 산자락과 계곡을 잇는 트레일로 보통 7일동안 걸으며 스코틀랜드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길로 알려져 있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는 글래스고 출신 톰 헌터(Tom Hunter)가 제안하고 스코틀랜드 귀족인 맨드필드 경(Lord Mansfield)이 1980년에 완성한 스코틀랜드 최초의 장거리 도보여행길이자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산악 트레킹이다. 하이랜드를 걷고 난 사람들의 평은 절반의 호평과 절반의 무덤인 거 같다. 너무 풍경이 단조롭고 밋밋해서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한 트레킹을 거리만 늘려 놓았다는 평가에 대해 나는 공감도 거부도 할 수 없다. 나 역시 가장 경치가 좋다는 한 구간만을 걸었기 때문이다. 한 구간 12km를 걷고 웨스트 하이랜드를 평할 수는 없지 않은가? 피터팬이 웬디와 동생들을 데리고 꿈에 부풀어 날아간 땅인데..



트레킹을 시작하면 길을 안내하는 나무기둥을 만나게 된다. 트레일을 안내하는 기둥엔 하이랜드 트레일 공식마크가 새겨져 있는데 엉겅퀴를 이미지화하여 만든 표기라고 한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에 대한 적개심을 자주 나타내는 데, 트레일 표기에까지 남아있을 줄이야.. 트레일의 마크인 엉겅퀴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전쟁할 때 잉글랜드군을 엉겅퀴가 자생하는 습지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참 유치하기도 하고 그 한을 이해할 거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영국은 세계의 제국이 되기 전부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통치했다. 그런데 영국의 통치가 부드럽지 않았는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는 한이 많다. 인도나 케냐, 이집트인들과는 아주 다르게 말이다. 영국의 세련된 식민지 정책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하이랜드 고원과 빙하 협곡을 이틀간 걷고 보니 스코틀랜드의 자연이 범상치 않다. 거칠고 매서움은 물론이고 자연상태의 트레일은 수렁같이 질퍽하여 걷기가 힘들 정도다. 아직 자연상태가 좋고 사람의 손때가 덜 묻은 땅이라서 그럴 것이고 어쩜 화산재가 쌓여 대지를 이뤄서 그런 건 아닐까.. 분쇄한 작은 돌을 바닥에 깐 정리된 트레일에서 벗어났다가 혼이 났다. 땅은 질퍽하고 사람이 오간 길이건만 곳곳이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 수렁이다. 한마디로 배수가 잘 안 되는 땅인 것이다. 입자가 너무 고와 배수가 안되 는가? 아니면 토탄이 단단히 굳은 대지라서 배수가 안되는가? 반면 비라도 오면 가파른 산비탈에는 물줄기가 수없이 만들어지고 물줄기가 우렁차게 치달아서 피요르드를 연상시킨다. 대지를 살펴보니 암반층 위에 얇게 이끼가 덮였거나 단단한 토탄층이기에 큰 나무가 자리 잡기에 어려운 조건이다. 그래서인지 대지는 나무하나 없고 이끼류와 헤더,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뿐이다. 토양도 얇고 나무도 없는 하이랜드를 걷고 돌아서려니 발길이 무겁다. 왜 이리 하이랜드는 무거울까.. .아일랜드는 걷기 좋은 땅이었다. 풍경도 트레일도 바람마저도 모두 걷는 자를 위해 봉사하는 듯했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보기 좋은 땅인 것인가.. 아직 스카이 섬이 남았으니 평가는 미뤄두어야겠지만..

이틀 걷고 나니 비로소 느낌이 온다. 하이랜드는 쉽지 않은 대지다. 그러니 피터팬이 웬디를 데리고 하이랜드로 나아갔겠지…

*Old Military Road: 1715년 자코바이트의 반란(Jacobite Risings) 이후 고지대의 반란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영국이 건설한 군사도로

─ 계속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트레킹 보기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