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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편 4화 : 4,000년 전의 나의 집을 드디어 만난것인가?

달빛이 좋다는 이유로 한 잔, 바닷바람이 유혹한다는 이유로 또 한 잔. 부두의 끝엔 뭐가 있을까, 궁금해 한 번 찾아가서 한 잔. 이래저래 와인 한 병에 맥주 두 병을 마셨다.
그리스에서 특이한 건 식사가 끝나면 독한 백주를 빼갈 잔(작은 잔)에 한 잔씩 준다. 40도 정도 되어 보이는 술을 그리스 사람들은 한 잔 탁 털어 넣고 식사를 마치는 것이다. 식사 때는 먹는 약이 있어서 안 된다고 술을 사양했지만, 달빛에 녹아 한 잔이 두 잔 되고, 술병이 늘어갔다.
“꽉 찬 달은 행운을 준다죠?”
“당신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우린 우리를 도피키스트(Dopikist)라고 해요, 애들이 낙담할 땐 할머니가 말씀해주시죠.넌 도피키스트야.”
“무슨 뜻인가요?”
“‘Homeland in the world’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중심이죠.”
“유럽의 중심이 아니던가요? 중국도 중화라고 하죠. 자기들이 중심이라고, 인도에도 그런 말이 있을 겁니다. 셋이 만나면 누가 중심일까요.”
“그리스일 겁니다.”
“왜죠?”
“우린 도피키스트니까요.”

[산토리니의 흔한 지붕]

그런 말을 하느라 한 병을 비운 것이다. 그런데 참 불필요한 말이었다. 술을 한잔하기 전 바기레스는 그리스의 미래가 불행하다고 말했었다. 세금이 3배가 늘어 60%가 세금이라고 투덜대며 이젠 돈 벌려고 일하는 게 아니라 세금 내려고 일하는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항만은 중국에, 공항은 독일에. 그것도 헐값에 팔았다.
그리스 재산을 다 팔아서 미래의 아이들은 팍팍한 월급쟁이로 살아야 한다고 등등.. 그리스의 경제적 현실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더 어려워졌다는 불만을 가득 늘어놓았다. 그런데 술 한잔에 우린 도피키스트야.. 바다를 바라보며 술 한 잔과 맛나는 안주면 되지. 뭐 그리 복잡한 세상 이야기는, 우리는 도피키스트..지난밤은 도피키스트를 외치며 보냈다. 로우트로(Loutro) 마을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해안가를 걷거나 수상 택시를 부르거나 하루 2편 있는 페리를 타야 한다.
우리는 지난밤의 술 핑계를 대려다 해안 트레킹을 건너뛸 수 없어 걷기 시작했다. 첫 지점부터 E4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유럽 전역이 협약에 의해 각 나라별로 길을 이어놓은 표시다. E4를 따라 유럽 전역을 걸을 수 있다는 데, 수만 킬로는 될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불가리아에서도, 루마니아에서도 산길에 통일된 표시를 보곤 했었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했지만 EU는 하나를 지향하며 여러 관계를 통합해가는 모양이다.
해안 트레킹은 조망이 좋았다. 답답한 계곡에서 뛰쳐 나온게 좋았고 바다와 대화하며 걸을 수 있는 여유가 좋았다. 특히 바다로 섭입되는 지능을 돌면 아늑한 해안선에 백사장이 나오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체로 수영을 즐긴다. 좀 탱탱하면 눈요기라도 할 텐데. 다 노쇠한 분들뿐이다. 그렇게 3시간을 걸어 트레킹을 끝냈다.
“하와이 해안 트레킹, 홍콩 해안 트레킹, 바이칼 호수 트레킹도 있어. 그래도 가장 긴 건 호주의 Great Ocean Walk 이지.”
크레타를 벗어나지 못한 바기레스에게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궁금한지 진지하게 듣다가 그만 돌아선다. 아마 크레타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떻게 아니라는 걸 알려줄 수 있을까..

[해안가의 돌탑]
[해안가의 길을 따라 걷는다.]

헤라클리온으로 돌아와 전설의 왕 미노스 왕이 지었다는 크노소스 궁전을 찾았다. 유적지를 휑하니 둘러보고 나니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4,000년 전의 유적이 어련할까.. 왠만한 건 그저 돌덩이고, 돌이 안착하였던 자리 표시 그런 것이다. 기둥이 버젓이 서 있는 데 붉게 채색되어 있다. 이거 믿을 수 있나?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중국 돈 왕의 막고굴이나 이집트 룩소르의 지하 무덤을 가도 자연 물감으로 그려진 벽화들이 세월이라는 무거운 상대를 못 이겨 색이 바랜 게 많다. 특히 햇빛과 바람에 노출된 벽화는 대부분 정상적인 게 없다. 람세스 2세의 지하 무덤에 들어가면 제법 화려한 벽화가 회랑을 따라 그려져 있었던 게 기억난다. 람세스 2세가 기원전 18세기 사람이니 크레타 문명이 탄생한 시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크노소스 궁전은 지상에 건설된 궁전이 아닌가? 햇빛과 바람을 어찌 이겨내고 아직도 붉은빛이 저리 선명할까? 갑자지 믿지 못할 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하는 사람의 설명을 들으며 유적을 돌아봤다면 1시간 30분도 부족했을 것이다.
혼자 휑하니 돌고 나니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바게리스와 만나기로 한 건 1시간 30분 후다. 1시간을 뭘하며 보내나. 벤치에 배낭을 베고 누우니 잠이 스르르 온다. 몸에 오한이 와서 일어나 보니 약속한 시각이 되었다. 4,000년 전에도 어느 누군가 이 자리에서 낮잠을 잤겠지. 나처럼.. 그는 누구일까? 궁전 경비병? 기록관? 아니면 왕? 난 잠시 4,000년 전의 그때를 다녀온 기분이다. 스스럼없이 긴 잠자리에 들었던 걸 보면 분명 나의 집이었던 게지..

[로우트로 마을의 교회건물이 보인다.]
[교회 근처에 세워진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