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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편-7화 : 파괴와 창조의 아이콘, 아테네

 

아테네의 호텔은 아크로폴리스(Acropolis)가 방에서 보이는 걸쭉한 호텔로 잡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아크로폴리스는 군사용 요새를 방불케 한다. 높은 절벽 위에 축성을 쌓아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산 위를 평탄하게 수평으로 만들고 궁전과 신전을 지어 도시의 수호 신을 모시고 유사시에는 산성인 아크로폴리스로 모여들어 적의 침략에 대응했을 것이다.
티베트에선 이런 유의 종교 성곽을 종(Dzong)이라고 한다. 티베트 사찰은 왜 접근하기 어려운 동산 끝에 짓고 그것도 좁은 창문과 두꺼운 벽과 대문 등 방어적 성격을 띠었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해답은 아주 쉬웠다. 사원은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사원이 무너지면 주변이 다 무너지는 것이고, 사원이 침략을 이겨내면 주변은 원상태로 사원에 귀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원은 방어적으로 지어질 수밖에.. 아크로폴리스도 아테네 주신을 모신 사원을 품고 있는 산성이다. 그러니 아크로폴리스가 바로 아테네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아크로폴리스의 위용은 군사용 요새를 방불케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보통 그런 자리는 왕과 신만을 위한 자리다. 그런데 아테네는 좀 예외의 길을 걸었다.
스파르타는 왕정이었고 다른 도시들은 귀족정치를 시행하고 있을 때 아테네는 여러 정치를 실험했다. 아테네도 처음엔 왕정이었으나 곧 왕정을 뒤집어엎고 귀족정치가 실행하였다. 금권정치이기도 한 귀족정치는 돈을 낸 만큼 권리를 행사하는 마치 주식회사 같은 결정구조다. 그러다 보니 부자들의 리그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줄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어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이를 참주 정치라고 하는 데, 한 명의 참주에게 권력이 모이면서 다시 왕정 같은 불균형이 생겼고 아테네 시민들은 다시 참주 정치를 거부하고 클레이스테네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민주 정치를 실행했다.
아테네의 민주 정치는 아테네의 모든 시민이 9일마다 모여 정책을 결정하는 참여 민주주의 제도였고 독재자를 방지하기 위해 심지어 도편추방제를 만들기도 했다. 6,000명의 찬성이 있으면 아테네에서 추방당하는 이 제도는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 제도를 만든 클레이스테네스마저도 도편추방제에 의해 아테네에서 쫓겨났으니 아테네인들은 민주적 참여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런 참여와 개방 정신이 아테네를 대표하는 학문적 토대가 되지 않았을까?
많은 지역에서 지식인들이 아테네로 모여든 이유는 바로 아테네가 갖은 사회적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아테네가 추구한 민주, 평등, 개방이 아니었을까?

[평평하게 깎은 산 위에 지어졌다.]
[유사시에는 최후의 보루였던 아크로폴리스]

아테네가 번성한 이유는 여러 요소를 꼽을 수 있다. 우선은 아테네 외곽에 있는 리우 광산의 축복이다. 이 광산에서 매년 25톤의 은을 캐냄으로써 아테네는 재정적으로 풍부해졌고 많은 재화를 시민들에게 배분해 줌으로써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부유해진 아테네는 많은 노예를 사들였는데, 당시 아테네 인구의 13~15%인 10만 명이 노예였고 시민의 수는 전 인구의 14%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국제화된 많은 외지인들이 아테네에 머물렀다.
아테네는 풍부한 은으로 주변과 무역을 하였으며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솔론은 그리스 은화의 은 함유량을 줄여 페르시아 은화와 등가시키는 정책을 쓰기까지 했다.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부터는 주변 국가들이 아테네의 해군에 안전을 맡기고 그 대가로 세금을 거두었는데, 그 세금의 규모가 아테네 전 시민이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정도였다고 하니 아테네는 전쟁 한 번 잘 해서 복 터진 꼴이다.
처음엔 아테네 해군의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 냈지만, 아테네 해군만 믿고 자체 해군을 해산해버린 도시들은 아테네의 요구가 커지면서 아테네에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모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 아테네뿐 아니라 스파르타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5세기에 있었고 이미 힘이 기울 대로 기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4세기 젊은 용자 알렉산더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그리스 전체를 진상하고 말았으니.. 무모한 욕심은 항상 화를 부르기 마련인가 보다.
아테네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변과 조화롭게 성장했더라면 아테네의 번영은 오래갔을 것이고 학문과 문화도 더 발전했을 것을.. 하지만 알렉산더는 시대의 부름을 받았고 한계에 부딪친 아테네를 대신해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길을 터 주었으니 무엇이든 역사적 역할이 있고 아테네는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이런 모순을 이해하려면 아테네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 해군에 강하고 주변을 착취하며 성장하는 도시였을까?
13세기 미케네인들은 트로이를 멸망시키러 전국에서 사람을 모았고 10년에 걸친 전쟁 끝에 승리하였다. 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은 아킬레스 같은 영웅만 있었을까? 각지에서 모여든 도둑과 해적들이 한몫 잡으러 뛰어들었고 트로이 성문이 열리면서 이들은 한몫 단단히 챙겼다. 이들은 원래부터 주거지가 있었던 게 아니니 돌아가는 사람만큼이나 주변에 정착해서 뿌리를 내렸다.
12세기에는 지중해에 이상기후가 덮쳤고 갑작스러운 기근으로 지중해 문명권은 힘들어했다. 이집트가 히타이트에 식량을 제공했다는 기록을 봐도 당시의 기근은 국가로서도 통제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회 운영 시스템조차 없었던 에게 해의 작은 해상 집단들은 오죽했을까? 그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문명 대지를 약탈한 건 어쩜 살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미케네 왕국, 히타이트 왕국은 멸망과 함께 사라졌고 이집트는 겨우 이들을 막아내 국가를 지켜냈지만, 국경이 너무 소진되어 쇠퇴의 길에 들어섰고, 내륙 국가였던 아시리아는 근거지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아시리아는 오리엔트를 최초로 통일한 왕국이 되었다. 12세기에 불같이 일어나 200년도 지나지 않아 감쪽같이 사라진 이들은 누구인가?
에게 해 동쪽 해안을 이오니아 지방이라고 한다. 이들은 여기서 출발해 지중해를 누볐다. 그리고 지중해의 여러 왕국이 바다의 민족 침략을 받아 지중해가 극도의 혼랍에 빠졌을 때 북쪽에서 도리아인이 그리스 반도로 이주하여 주인 자리를 꿰어찼다. 특히 펠로폰네소스에 정착하며 이 땅에 살던 이오니아인을 쫓아냈다. 이오니아인은 펠로폰네소스에서 쫓겨나 지금의 아테네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바다의 민족은 그 시점에 역사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들이 이오니아인들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닐까?
아테네가 바다로 나가고 무역을 하는 상인 집단이고 배를 잘 다루고 해군이 유난히 강했던 이유와 스파르타가 육군 중심의 전사 집단이었다는 것이 이런 태생적 차이는 아닐까? 육지의 사람 스파르타. 바다의 사람 이오니아, 결국 이오니아인은 지중해의 모든 문명을 풍비박산 내 바빌론, 페르시아에 의해 재건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으며 이 영양분을 받아 스스로 문명을 이룩했으니 파괴와 창조의 아이콘이 아테네가 아닌가?
불가리아에서 시작해 루마니아를 거쳐 그리스에서 끝을 맺은 이번 발칸반도 트레킹 여행은 아테네가 종착점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22여 일의 긴 여행의 마지막 밤. 얼마나 긴 시간을 소유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집에 있었다면 22일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렸으련만, 여행에서의 22일은 2년 같이 길고 뒤돌아봐도 지나간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불가리아는 이미 까마득한 옛날 같고, 루마니아도 한때의 젊은 시절 같다. 그렇게 보낸 22일간 나는 15개의 여행 일기를 썼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너무 주관적이라 오류투성이일지 모른다. 충분히 공부하고 자료를 검토하지 못한 한계가 있지만 길 위에서 느끼는 대로. 아는 대로 쓴 여행기니 발칸 트레킹 여행의 시발점으로 족하며 지난 시간을 엮어낸 느낌과 감정의 산물로 남겨놓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리스인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