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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편 3화 : 비참한 자에게는 희망밖에 약이 없다. 

인터넷으로 날씨를 검색하더니 지브코의 걱정이 태산이다. 여기 날씨는 맑지만, 건너편의 릴라산군에는 비가 온다며 아침 밥상을 받고도 한 술 못 뜨고 있다. 내가 할 걱정을 저놈이 왜 이리하는지.. 책임감 있는 젊은 친구를 만났으니 불가리아 트레킹은 복 터진 게 분명하다.
“비온다고 산에 안 가면 그게 산악인이야.. 우천 불구지.”
자나 깨나 하던 말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비가 온다 싶으면 산에 안 갔고,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소식이 없나 귀 기울인 적도 많았다. 릴라산군의 날씨를 묻는 내가 그런 심정이 아닌가.. 지브코는 어쩔 수 없다며 릴라로 가기를 재촉한다. 차로 1시간 30분을 달려 릴라산군에 자리 잡은 작은 휴양도시 반스코(Bansko)에 도착했다. 반스코는 구름만 짙을 뿐, 덥다 싶을 만큼 햇살이 살가웠다. 다시 30분 이상 산길을 달려 깊은 산중에 차를 세웠다. 산중이라서 그럴까? 검은 구름이 산을 잡아먹을 듯 밀려오는 게 보였다. 산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지. 예측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오는 듯 가고, 가는 듯 오고 하니..

[하늘을 집어삼킨 안개]
[안개가 자욱한 등산로장]

아늑한 숲길에 차를 세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찌뿌둥한 날씨에 비까지 내리고 있어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산장에서 1박 할 생각이어서 보온의류에 개인침낭까지 넣으니 배낭의 무게가 제법 나간다. 등산로는 무척 아늑하고 좋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 사이로 두텁게 쌓인 솔잎 길을 걷는 기분이란 술 한턱 얻어먹고 집에 가는 한량 부럽지 않다. 하늘까지 솟아오른 나무 끝은 하얀 비구름이 내려와 있고 울창한 숲은 안개를 머금고 있어 숲길은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비가 말썽이다. 대지가 젖어가듯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몸도 천천히 젖어갔기 때문이다. 몸이 젖는 것도 불편한데, 세상이 오리무중이니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 먼 길을 왔는데, 산 모양새가 어떤지 가늠하지도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비가 언제나 그치려나 하는 기대 반, 아쉬움 반의 마음은 애절하기만 하다. 빗방울이 굵어질수록 비참해지는 내 신세를 어쩔까?
‘비참한 자에게는 희망밖에 약이 없다.’ -셰익스피어
되씹을수록 멋진 말이다. 비참해지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희망을 꿈꾸는 일밖에 더 있으랴. 그렇게 희망을 꿈꾸다 보면 희망이 오지 않을까.. 희망이란, 기다림의 대가일 수도 있으니.. 1시간을 걸어 도착한 허름한 산장에서 콩 수프에 빵 한 조각을 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다시 출발하려고 배낭을 메는데, 거짓말같이 비가 멈추고 구름이 하늘 한 켠을 비켜주어 푸르게 반짝였다. 참 희망이란 이렇게 다가오는구나, 간절하기만 하면..
지브코는 오늘 산행에 대해 아침에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은 릴라 산 정상 전 넓은 플라토까지 오르는 데 4시간 30분, 산장으로 내려오는데 1시간. 그래서 6시간이고, 산장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에는 SEVEN LAKE 트레킹을 6시간 하고, 하산하는 총 2일간의 산행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3시간만에 플라토에 닿았다. 그러니 다음날 돌아볼 호수를 오늘 돌아볼 수 있었다. 비록 7개의 호수를 다 돌아볼 수는 없지만, 4개의 호수는 얼마 걷지 않아 한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되었어. 산장 가서 차나 한잔하세. 그리고 리프트를 타고 하산을 하면 어때”?
시즌이 지나 뒤숭숭한 산장보다는 깨끗하고 편안한 호텔이 낫잖아. 하룻밤을 자도.. 일정대로 산에서 자자는 지브코를 설득해서 겨우 하산했다. 릴라산의 정상 전 플라토는 35년 전 첫 지리산의 세석이나 한라산의 윗세오름을 오르던 그런 길이었다. 대지를 덮은 관목이 턱을 괴고 밀어올리는 기운이 얼마나 거세던지 두리번거리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25년 전 한라산이 그랬었다. 풍요로운 자연속에 감추어진 좁디좁은 등산로를 걸었었다. 그런데 속살이 드러나다 못해 돌이 굴러다니다 오가는 발걸음에 차이는 길이 되어버렸다. 자연이 감내할 수 없울만큼 사랑을 듬뿍 준 우리네 사정이지만 자연이 황폐해진 아쉬움은 어쩔 수가없다.

RILA LAKES
[안개가 많이 옅어졌다.]
[산행 중 잠시 들렀던 허름한 산장]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봐도 둥그스런 산봉우리는 꽃봉오리 같다. 완만한 동산의 정점에 오르면 발칸, 피린 그리고 릴라의 최고봉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는 데. 여전히 산은 구름 속에 있다. 단지 내가 구름 위로 올라온 것이다. 검고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하얀 구름이 산골짜기에 내려앉아 내가 선 곳은 구름과 구름 사이의 틈인 것이다. 누가 이런 공간을 남겨 두었을까? 올라오는 노고를 격려하려는 섭리자가 아니고서야 정상만을 간극으로 두고 구름과 구름이 대치하고 있을까?
“지브코, 그대의 신이 우호적인가 보다.”
“아닙니다. 선생님의 신이 마련한 선물인가 봅니다.”

누구의 신이면 어떤가 향유하는 자의 재산인걸.. 봉우리를 넘어가니 릴라산의 고봉을 감싸는 암릉과 내가 오른 플라토 사이에 아늑한 호수가 4개나 펼쳐져 있다. 내일 찾아갈 7개 중 하단부의 4개인 것이다. 해가 맑으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련만 해를 받지 못한 호수는 푸르다 못해 검푸르다. 호수는 산 정상에도 자리를 잡고 산 중턱에도 자리를 잡고 산 아래도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제멋대로 자리 잡은 호수는 산을 빛내고 산은 호수를 품어 인자하게 보인다. 그러니 산과 호수는 절친이 아닌가.

[호수 주변의 식물들]
[붉은 잎사귀가 매력적이다.]

그런데 수량이 풍부한 호수는 물을 끌어모아야 하니 어디에 자리를 잡든 여러 개가 같이 조화롭게 안착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방문한 불가리아는 피린도 그렇고 릴라도 그렇고 산 정상을 이루는 플라토(넓은 능선)에 작은 호수가 징검다리 같이 퍼져있다. 더더군다나 호수를 감싸는 주변 산세는 물을 품지 못하는 암봉일 뿐이다. 바위 밑에서 물이 솟구쳐오르기라도 하는 것인가? 이유가 어쨌든 불가리아의 산은 호수를 품고 숲이 감싸는 영양가 있는 산이어서 걷는 자의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마력의 대지였다.
희망을 보았으니 그만 소피아로 돌아가려던 생각을 접고 발칸산맥으로 방향을 틀었다. 불가리아를 남북으로 나누는 가장 중요한 산맥인데 발칸을 접어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RILA LAKES
[고요하고 잔잔한 검푸른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