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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편 2화 : 이름 없는 부고장

기상과 함께 날아든 부고장. 환절기에는 많은 부고장을 받지만, 대부분 동년배 지인들의 부모님들이다. 그런데 가끔은 동년배의 부고장을 받는다. 그런 날은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렸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지인을 돌아보며 오늘 점심은 기분 좋은 사람과 만나 맛난 걸 먹자고 주변에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살아있는 동안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부고장을 받았다. 자살한 동년배 지인의 부고장이었다. 왜 지인은 자살을 선택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들이 그에게 있었을까?
시나이아행 기차에서 나는 그와의 인연을 돌아봤다. 서로 알고 지낸 게 20년이나 되지만 얼굴만 익힌 정도의 사이였으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지인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고독하고 절망적이라고 느낄 때면 여행을 꿈꿨고, 여행을 떠났다. 지금도 여행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여행은 삶을 값어치 있게 재단장해준다. 그건 혼자 있다는 감정이 같이 있다는 충만감으로 바뀌게 하기 때문이다. 아직 메시지 보낼 가족과 지인이 남아있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는 여행. 고립무원 할 때 자신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면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루마니아에서 첫 탐방지 시나이아에 내렸다. 25년 전과 같이 기차를 타고, 내가 내린 역사는 25년 전 그 아이를 만난 역사 그대로다. 하지만 지난 과거는 내 마음속 어디에도 그리 간절하지 않다. 애절했다면 25년이나 잊고 있었을까? 루마니아에 오게 되고서야 시작된 감정 드라마가 아니었던가, 허튼 놀이 그만두고 산으로 가야겠다.
시나이아는 카르파디아 산맥의 중심 산간마을이다. 배낭 하나지만 노트북과 불필요한 짐들이 가득해서 호텔에 짐을 풀고 산에 오르려고 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체크인이 3시란다. 어쩔 수 없이 배낭을 맡기고 코타 2,000 때 만든 케이블카 역으로 향했다. 케이블카는 1,400m에 한번 서고, 다시 다른 케이블카를 갈아타, 다시 2,000m에 내렸다. 최종 종착역인 코타 2,000. 즉 고도 2,000m의 주변은 온통 하얀 눈밭이다. 올해의 첫눈을 여기서 또 만나니 카메라에 담아 지구 반대편 서울로 퍼 날랐다.

[23년 전 그 아이를 만났던 역사]

카르파티아 산맥의 최고봉인 오무산장을 가려 했지만 짙은 안개로 시도조차 어려웠다. 하얀 눈밭과 짙은 안개는 늘상 다니던 사람도 길을 잃기 쉽다. 두리뭉실한 정상 능선까지 케이블카로 올라왔으니 여기서부터 오무산장까지는 한라산의 만세동산같이 지형지물 하나없는 밋밋한 구릉일 것이다. 그렇다면 길 잃기 딱 좋은 지형이다. 몇 분 걷다 보니 잘못하다간 조난당해 죽겠다는 생각이 섬뜩 들었다. 그래서 5분도 못 가 발길을 돌렸다. 5분밖에 걷지 않았는데도 돌아오는 길이 보이질 않아 케이블카 역으로 돌아오는 데도 진땀이 난 걸 보면 5분을 더 갔으면 정말 큰 일을 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산은 가벼이 볼수록 깊이 빠지는 늪 같다.
메스너(인류 최초로 8,000m 봉 14개 정상에 모두 선 이탈리아 산악인)는 한 번도 산에서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확신이 섰을 때 도전했고 안전하게 내려왔다. 그의 확신은 무엇인가?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병법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산을 충분히 알고 그 산에서 무엇을 어찌 행동할지 충분히 검토했으며 짜여진 계획대로 빈틈없이 움직였기에 메스너는 항상 산에서 살아 내려왔고 그는 위대한 성취를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땠는가? 아무 생각 없이 케이블카 타고 올라와 겁 없이 가려 한 내가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닌가? 위험은 위험한 산에만 있지 않다. 쉽게 보이는 산의 사망률이 더 높다고 하지 않는가? 봄철 지리산에서 얼어죽는 인명사고의 이유가 달리 있을까? 한겨울도 아닌데.. 내려가서 지도부터 사야겠다. 아니면 등반 가이드를 한 명 구해봐야겠다. 꼭 카르파티아 산맥의 정상에 오르고자 한다면..

[역사는 변치않았다.]
[온통 하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