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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CUBA

쿠바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쿠바라는 말이 주는 매력은 조금 색다릅니다. 쿠바는 두려움 반, 우려가 반이어야 합니다. 반미이고 사회주의이며 정치적 구호와 혁명의 열기가 출렁거리는 사회 때문은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의 사회를 결속하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인으로부터 온 메일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헤밍웨이가 묶었다는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호텔에 짐을 풀고 아바나의 첫 날을 보낸 소감은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살만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모니라고 지인은 말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편견 때문에 절제된 행동과 규격화된 표현, 획일화된 삶의 터전일거라는 저의 상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집니다. 그건 북한식 사회주의이고 쿠바식 사회주의는 전혀 다른 모습이니 쿠바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무척이나 기대가 됩니다. 구 시가지의 식당은 노래와 여유가 넘쳐납니다. 한국에서 비싸다는 바닷 가재와 와인을 곁들여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데 $30정도면 가능하니 노래와 맛과 멋이 충만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쿠바의 첫 인상이 아주 좋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호텔에서 대표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구상했고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즐겨 묵었다는 511호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를 상품화한 호텔이다 보니 호텔 입구부터 헤밍웨이로 도배가 되어있습니다. 누군가는 헤밍웨이를 과대 포장된 작가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 외 기타 작품은 상업화된 그저 그런 작품이라는 평가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대표작으로 이야기할 뿐이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나만으로도 떠들썩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충분히 위대한 작가에 올라갈 만합니다.

헤밍웨이의 가슴에 불을 지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어릴 적 흑백 영화로 본 아련한 기억이 나는데 젊은이의 가슴을 뜨겁게 할만한 시대성이 강한 영화입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봉기로 정권을 잡은 인민 정부와 보수 세력간의 국내 전쟁을 말합니다. 조금 더 극한 표현을 쓰자면 양심적인 지식인, 노동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시민군과 카톨릭교회, 대지주를 옹호하는 반정부군과의 내전입니다. 좌파 연합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합법적인 정부를 구성했음에도 프랑코를 앞세운 보수 세력이 이에 반대해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시민들이 정부를 지지하며 총을 들고 쿠테타군에 맞서는 일이 벌어집니다. 시민군의 저항이 거세지자 프랑코는 모로코에 있는 2만 7천여명의 휘하 병력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해군이 쿠테타에 동조하지 않았고, 쿠테타가 실패로 돌아갈 때 쯤 히틀러와 뭇솔리니가 전폭적으로 프랑코를 지지합니다. 히틀러는 수송대를 보내 프랑코의 병력을 실어 날랐고 뭇솔리니는 5만여 명의 병력을 지원해 주기까지 합니다. 반면 소련이 좌파 정부에 무기를 지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정부 시민군과 쿠테타 반군의 내전이 되고, 외부적으로는 두 정치 세력의 대결 양상을 보였습니다. 한편 세계의 지성인들은 이 전쟁을 스페인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양심 세력과 탐욕스러운 파시스와의 싸움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질적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를 지원했고 프랑코는 또 다른 파쇼였으며 유렵 전역에서 모여든 지성인은 국제 여단이라는 이름으로 시민군 편에서 전쟁을 합니다. 국제 여단은 스페인 내전 중 5만 여명에 이를 정도로 유럽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참 우습게도 이라크, 시리아에서 활동하는 IS에도 “국제 여단”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유럽 젊은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도 미국을 파쇼, 자신들은 정의에 귀 기울이는 양심이라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은 역사가 평가할 일이지만 IS가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국제 여단과 같이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헤밍웨이는 종군 기자 신분으로 국제 여단에 참여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행동하는 지성으로 불린 앙드레 말로 역시 자신에게 총을 달라며 스페인으로 달려갑니다. 헤밍웨이가 소설로 저항했듯이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붓으로 프랑코의 학살과 부당함에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프랑코의 승리로 끝이 났고 여기에 고무된 히틀러와 뭇솔리니는 세계 2차 대전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에 소련도 손해 보지 않는 장사를 합니다. 남미에서 잔뜩 가져다 쌓아둔 금을 받고 무기를 팔았기 때문에 볼세비키 혁명 후 취약한 산업 기반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또 무기를 만들어 내며 군수 산업이 성장하는 득도 톡톡히 봤습니다. 이런 뒷배가 2차 대전에서 소련 승리의 견인차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전쟁입니다. 영국과 미국이 적극 참여하여 히틀러와 뭇솔리니를 눌러 놓았더라면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1차 대전을 정리한 베르샤이유 조약이 2차 대전의 빌미를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1차 대전으로 미국에 빚을 잔뜩 진 승전국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독일에게 요구합니다. 전쟁 배상금에 독일 경제가 파탄나자 유럽 전체가 덩달아 곤두박질을 치게 됩니다. 미국 마저도 1차 대전 중 과잉 투자와 과잉 생산의 후유증으로 대공황을 겪었습니다. 이 때 히틀러가 나타나게 됩니다. 독일 군부는 히틀러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쿠테타를 일으키려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연락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혼란에 빠지면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까 우려하여 쿠테타에 반대하며 히틀러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너무 거대해져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을 때 소련과 손을 잡습니다. 결국 히틀러의 파쇼 정권을 키운 것은 독일 국민이 아닌 영국과 프랑스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의 불행도 2차 대전도 영국과 프랑스의 우유부단함이 시작이었습니다. 서구 사회는 그 때의 교훈을 되새기며 금언처럼 따르는 구절이 있습니다. ‘불량 국가와 손잡아서는 안된다’는 구호입니다. 그나저나 한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프랑코가 해야할 것 같습니다. 시민에게 총을 겨눈 군대는 누구를 위해 승리의 종을 울리는 것인지요..

헤밍웨이 투어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시작해 일정한 동선을 따라 갑니다. 우선 그가 하루에 한 번은 지나쳤을 광장의 대성당으로 갑니다. 대성당은 콜럼버스가 100년간 묻힌 유서 깊은 곳입니다. 그는 후손들에 의해 세비아 성당으로 옮겨갔지만 그러기까지 시대를 연 인물에게 적합한 대접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초기 정복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스페인 왕실은 정복의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왕실에서 직접 대리인을 보내 식민지를 관할했으며 콜럼버스가 맺은 산타페 조약은 그의 가문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몫을 달라고 왕실에 청원했지만 국왕 입장에서 보면 돈이 되는 후추와 황금은커녕 담배와 신대륙 풍토병인 매독만 가져왔을 뿐 돈만 들이고 얻은게 없는 손해 본 투자였습니다. 그러니 왕실은 그의 청원을 묵살합니다. 콜럼버스는 시대의 문을 열었음에도 별 재미를 보지 못한 채 쓸쓸한 말년을 맞이합니다.

콜럼버스가 묻혔다는 성당은 정면에서 보면 좌우 탑이 비대칭 모양입니다. 왼쪽 종탑이 작고 뒤로 한치 들어가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광장에 물이 고이지 않고 흘러나가게 하는 배려라고 합니다. 두 번째 방문지는 헤밍웨이가 하루에 한 번은 찾아갔다는 라 보테키타 bar입니다. 그는 특히 럼 칵테일을 좋아해서 럼에 민트 잎을 넣고 막대기로 저어 먹는 모히토(Mojito)를 즐겨 마셨는데 특히 라 보테키타의 모히토를 좋아해 매일 이 곳을 들렸다고 합니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거리라 찾아 가봤지만 이미 소문을 듣고 온 관광객으로 가득 차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실내 벽에는 헤밍웨이의 친필 사인이 있다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고 합니다. “내 삶은 라 보테키타의 모히토와 엘 플로리디타의 타이키리에 존재한다.” 노인과 바다의 소재인 코사마 마을의 라 테라짜라(La Terraza) 식당과 암보스 문도스 호텔을 나와 집을 얻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습니다. 새로 얻은 그의 집이 헤밍웨이 투어의 동선이라지만 하루를 꼬박 써도 부족해 이것으로 쿠바의 첫 날을 마감합니다.

아바나의 둘째 날 해협 건너 보이는 아바나 성을 찾아갑니다. 콜럼버스는 육지에 첫 발을 내딛은 땅을 구세주라는 뜻의 ‘산살바도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두 번째 섬에 닿아서는 성모 마리아의 다른 이름인 ‘과달루페’라고 붙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섬에 닿아서는 삼위일체를 뜻하는 ‘트리드나드’라고 붙였습니다. 네 번째 섬에 닿아서는 성녀 우르슬라를 따라 순교한 1만 1천여 명의 동정녀를 가리키는 뜻에서 ‘버진 아일랜드’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쿠바에 닿습니다. 쿠바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 스페인으로 돌아갑니다. 쿠바는 동서로 길게 생긴 섬이라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쿠바가 섬이 아닌 육지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쿠바는 그렇게 알려졌고, 스페인과 아메리카를 잇는 연계 항구로 개발됩니다. 지금 오르나 아바나 성은 그런 목적으로 지어진 성입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캐리비안 해적은 영국 왕실이 키우는 해적 군단입니다. 이들은 아메리카에서 금을 싣고 스페인으로 항해하는 배를 공격해 납포하는 해적질로 영국의 곡간을 채워준 애국자이기도 하고 스페인과 영국이 맞붙은 타라팔가르 해전에서 선봉 부대로 활동하며 스페인 함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비정규군입니다. 해적 집단에 의해 스페인으로 향하는 상선의 납포가 잦아지며 스페인은 세빌라 항구와 아메리카는 아바나, 멕시코의 베라쿠르즈, 부에노스로 교역항을 제한합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메리카와 스페인을 잇는 중계 지점에 요새를 만들고 전함이 선단을 호위하기 이릅니다. 그렇게 신대륙과 스페인의 연계항이자 물류 중심지로 건설된 것이 아바나 요새입니다. 아메리카 각지에서 스페인으로 건너갈 상선들은 일단 아바나 항에 모여 무적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스페인으로 일 년에 한 번 건너갔기 때문에 아바나는 아메리카와 스페인의 중계지로서 번성합니다. 그 때 스페인이 해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지은 요새가 아바나 요새의 시작입니다. 아바나 요새는 스페인의 주문으로 이태리 기술자가 건축합니다. 해안을 따라가는 성곽의 곡선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더니 로마의 미적 감각이었습니다. 요새는 이중 성곽으로 되어있고 성곽에 오르니 대포부터 기관포까지 다양한 포신이 바다를 향해 정렬되어 있습니다. 아바나 성에서 해협 건너 아바나 시내를 내려다보니 해협을 두고 마주한 성곽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서있는 요새 이 외에도 아바나 요새는 총 3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마 도시를 감싸는 건너편 오새가 가장 큰 주 요새이고, 대 성양과 마주한 여기가 가장 외곽의 방어지인 것 같습니다.

 요새 안에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스페인 군인의 철모, 화승총 등 다양한 무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도 군대에서 사격을 해봤지만 개량된 M16 마저도 표적을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대포야 오죽했을까요, 캐리비안 해적은 날렵한 배를 타고 스페인의 식민 도시들을 수시로 공격해 필요한 만큼의 재물을 가져갔고 스페인은 그들을 지키느라 진이 빠져 천천히 국력이 쇠잔해졌는지 모릅니다. 반면 영국은 해적을 돌보며 힘 들이지 않고 강탈해온 재물을 취하며 천천히 스페인을 따라 잡았을까요? 해적을 영웅으로 동상까지 세운 나라이니 해적이 영국에서는 해적이 아닌 모양입니다.

 아바나 요새 출구에는 1762년의 어느 해전을 기념하는 포스터가 걸려 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니 영국이 아바나를 침공해 지배했고 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른 날을 기념하는 포스터입니다. 참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스페인도 악덕 지배자이긴 마찬가지인데, 시각은 철저히 스페인의 편에 있습니다. 250년 전 사건이지만 영국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바나를 11개월이나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아바나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플로리다를 가져갑니다. 영국에게 패한 스페인은 후에 미국에게도 패하여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잃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도 점령당해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독립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스페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만 떵떵거렸지 한 번도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약골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즈텍이나 잉카의 마지막 왕이 알았더라면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을 것입니다.

 예부터 항구에는 금전이 돌기 때문에 유곽과 유흥 문화가 자리합니다. 배사람 입장에서 보면 한 번 나가면 6개월 이상이 걸리기도 하고 어쩌면 돌아오지 못하기도 하는데 부두에서 돈을 뿌리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배가 들어오고 나갈 때면 부두에 돈이 넘쳐납니다. 그렇게 흥청망청 거리던 아바나는 아시아의 홍콩 같은 곳입니다. 홍콩 간다는 말이 아주 황홀하다는 말로 통하던 제 어린 시절, 홍콩의 존재가 궁금했었습니다. 홍콩의 실체는 뭔가요, 홍콩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매춘이 있고, 마약이 있고, 술이 있고, 도박이 있습니다. 그에 더해 황홀한 숙박지와 맛있는 음식까지 모두 갖춰진 황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매춘, 도박, 마약은 위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즐길 수 있다면 행정적인 지원이 있어야 하니 홍콩은 갈망의 도시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모든 도시가 홍콩이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바나는 아시아의 홍콩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쿠바의 명품 호텔 내셔날(National)호텔은 당시 놀새들이 미국에서 건너와 진탕 놀고 간 대표적인 호화 호텔입니다. 하루를 묵기위해 호텔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위세가 등등합니다. 로비는 궁전을 연상케 합니다. 5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기에는 아주 화려했을 면모를 상상하게 합니다. 건물을 이곳저곳 둘러보며 벽에 걸린 사진을 확인하니 알려진 인물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50 ~ 60년대 유명한 놀새들 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에게도 익숙한 유명 연예인도 있고 사진핑, 후진타오, 반기문, 룰라 등 세계적인 지도자들도 빠지지 않습니다. 사진작가 살가두는 “사진은 해석이나 번역이 필요 없는 강력한 언어이며 이것이 사진의 힘이다.”라고 말합니다. 내셔날 호텔에 걸린 사진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쿠바를 방문한 모든 귀빈은 이 호텔의 손님이었고 오늘 이 호텔에 묵는 당신은 세계의 리더입니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너는 희대의 놀새야”라는 말은 아닌지요,

늦은 저녁에 나와 케딜락 택시를 타고 해안가를 달립니다. 뚜껑이 열리는 케딜락은 1940년대의 제품입니다. 택시 안은 할로겐 등으로 치장하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아마 록펠러와 같은 석유 재벌이나 마를린 먼로와 같은 유명 배우가 탔을법한 폼새나는 차에 오릅니다. 혁명 전 쿠바에는 40대의 케딜락이 굴러다녔는데 그당시 케딜락의 3대 중 2대는 바티스타 부인의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쿠바는 미국과 바티스타 가문의 공동 소유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확률로 보면 제가 탄 차는 혁명 전 가장 부패한 정권의 안주인 바티스타 부인 소유의 차일 듯 합니다. 확률을 높이기 위해 돌아오는 케딜락 택시는 뚜껑이 있는 차를 골라 탔습니다. 중사의 신분으로 쿠테타를 일으키고 쿠바를 통째로 팔아먹은 남자의 부인, 그녀는 30대가 넘는 케딜락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쿠바의 가장들은 600만명 중 50만명이 실업자였고 문맹률이 43%에 달했으며 그나마 얻은 일자리도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이었으니 12명으로 시작한 카스트로의 혁명이 왜 성공했는지 그 안에 해결 코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바나의 셋째 날은 럼 공장과 시가 공장, 혁명 광장을 돌아봅니다. 럼은 하마군도에 정착한 영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증류 기술을 뽐내기 위해 사탕수수를 증류하여 술을 만드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럼의 원료가 사탕수수이다 보니 현재도 카리브 연안 국가들에게서 많이 생산됩니다. 쿠바의 대표적인 럼인 하바나 클럽 공장을 방문하면 하바나 클럽의 역사와 생산 과정을 보여주는 투어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참가 후에는 고급 럼을 한 잔 얻어 마시며 술을 구입하게 됩니다. 보통은 $40 정도이지만 비싼 럼은 $150 정도의 가격입니다. 대부분의 럼의 원액은 흰색인데 비싼 럼은 붉은색을 띄게 됩니다. 오크통에 숙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흰색 럼은 저렴한 럼이 많고 고급 럼은 붉은색이라고 봐야 합니다. 과테말라 공항에서 사탕수수의 새 순을 발효해 만들었다는 Zacapa 럼을 한 병 샀으니 하바나 클럽을 한 병 더 삽니다. 럼은 쿠바인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술로 럼에 콜라를 섞으면 쿠바 리브레(쿠바의 자유)라 부르고, 레몬과 민트 잎을 섞으면 모히토가 됩니다. 저는 오늘부터 모히토를 그만 마시고 쿠바 리브레를 마시기로 했습니다. 혁명 전사들이 외로움을 달래며 마셨던 쿠바 리브레, 콜라와 럼의 배합은 배고픈 서민의 얼굴입니다. 사탕수수를 발효한 알코올에 콜라를 섞어 마시며 ‘쿠바의 자유’를 목청 껏 외친 혁명 전사들을 생각하며 저도 잔을 들어 올립니다. ‘쿠바 리브레!’

쿠바와 미국과의 애중은 사실 사탕수수에서 시작됩니다. 혁명 전 쿠바는 세계 사탕수수 생산량의 1/3을 차지했고 대부분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 수출의 85%가 사탕수수였습니다. 미국은 사탕수수로 호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보스턴 홍차 사건을 미국 독립의 신호탄으로 보지만 홍차보다 설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은 재정 결손을 홍차에 높은 세금을 붙여 해결하려 했고 아메리카 주민들은 이에 반대하면서 독립 전쟁의 불꽃이 일어났지만 그와 같은 이유로 영국은 식민지인 미국에 사탕수수 수입을 제안 합니다. 사탕수수가 없어 설탕을 만들지 못했던 미국은 영국 설탕을 사야했고 비싼 영국 설탕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최고조로 오른 상태였습니다. 물론 홍차에도 설탕이 들어가야만 하니 홍차보다 설탕이 더 자극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제 2대 대통령 애덤스매스는 “설탕이 독립 운동의 원동력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설탕은 미국 식민지 주민들을 자극했습니다. 독립 후에는 산업 성장을 하고 있던 미국이 세계 최대의 설탕 소비국이 되었고 대부분의 원료를 쿠바 농장에서 헐값에 가져오게 됩니다. 쿠바의 독립은 스페인과 미국 전쟁의 부산물이고 스페인 대신 미국이 종주권을 행사했으니 쿠바는 독립은 했지만 모든 산업이 미국 자본에 지배를 받는 종속 상태였습니다. 물론 놀새들의 놀이터로도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카스트로가 미국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설탕 통제권을 가져가니 쿠바와 미국의 사이가 심하게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미국이 쿠바를 증오하게 된 첫 걸음은 미사일도 좌파 정권도 아닌 설탕이 원인입니다. 설탕의 폭발력을 알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쿠바는 설탕을 가지고 장난치는 미운 오리새끼였으니까요…

 럼 공장을 나와 시가 공장을 찾아갑니다.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시가 공장은 작은 농촌 마을입니다. 농장에서는 시가를 파는데 묵직한 시가 하나가 $1밖에 하지 않습니다. $1로 남는 장사가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시가를 만드는 과정을 보니 자연 상태의 담배 잎을 말아 끝을 두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휠터가 없습니다. 니코틴이 문제되지 않냐는 질문에 화학 처리를 하지 않아 몸에 해롭지 않다고 합니다. 필터가 없어도 담배는 독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담배에는 왜 그렇게 많은 향료와 화학 물질을 넣어 가공하는지, 쿠바의 담배는 다른 농산물과 마찬가지로 유기농입니다. 쿠바가 유독 담배로 그것도 시가로 유명세를 탔으니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유기농이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쿠바가 담배의 상징처럼 된 데에는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아바나 요새에서 본 포스터는 아바나를 공격해 11개월간 점령한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 기념 포스터인데 그 원인이 담배였습니다. 담배와 쿠바의 인과 관계는 무엇일까요, 콜럼버스는 쿠바에서 담배를 스페인으로 가져갑니다. 유럽인들은 구멍에서 솔솔 피어나는 연기가 신기했을 것입니다. 다들 몹쓸 짓이라고 회피했지만 콜럼버스가 담배를 유럽으로 가져오고 100년이 지난 17세기에는 세비아에 담배 공장이 세계 최초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유럽 전역에 확산되며 귀족들의 품격을 대변하는 필수품이 되어 큰 시장을 형성합니다. 그렇게 되자 스페인 왕실은 전매품으로 묶어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고 쿠바에 대규모 담배 농장을 조성합니다. 당시 아바나 근교에서 재배한 시가를 “엘아바노”라고 할 만큼 쿠바는 담배 잎의 대표적인 생산지가 됩니다. 스페인 왕실이 쿠바 생산 담배 잎을 독점하면서 영국은 담배 수입으로 지불해야 하는 경제적인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됩니다.

1762년 영국의 아바나성 공격은 담배 잎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스페인의 싸움이었습니다. 영국은 담배를 얻기 위해 아바나를 공격했고 11개월간 점령했으며 담배에 대한 독점을 스페인 왕실이 포기한 후에야 플로리다를 선물로 받고 물러납니다. 그 후로도 영국, 미국, 독일 등 여러 나라가 담배 공장을 세우며 세계의 기호 식품이 되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애연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나는 쿠바를 물고 있다.”고 할 만큼 쿠바산 시가를 즐겼으며 국제 회의에서 입에 문 담배를 꺼달라는 진행자의 요청을 받고 입에 문 시가를 비벼끄며 반대손에 들고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담배를 즐기고도 장수했으니 지나친 금연만이 장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가의 품격을 더하는 시가 띠는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왕을 위한 것이랍니다. 여왕은 담배를 무척 좋아했는데 손에 담배 진이 묻어 불편했습니다. 이를 본 신하가 담배 진이 묻지 않게 시가에 띠를 두른 것이 시가 띠의 시작이 되었다네요, 아바나 요새의 건너편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가가 전시되어 있다는데 시간이 늦어 가보지 못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 역시 시가 애호가로 그는 코이바 시가만 피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코이바 시가는 시중 담배와 같이 투박하지도 굵지도 않고 잘 다듬어져 있어 가볍게 피우기에 좋아 보입니다. 코이바 시가는 럼과 함께해야 어울린다지만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눈 인사만 하고 지나갑니다.

아바나 시내로 돌아와 해 질 녘 혁명 광장을 돌아봅니다. 어느 나라든지 수도에는 광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여의도 광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공원이 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정치의 시대에는 광장이 필요하고 평화의 시대에는 안식처가 필요하니 제 개인적으로는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 광장에는 국회와 대통령궁이 있고 139m의 호세 마르티네스의 탑이 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탑앞의 단상에서 매년 대중을 향해 연설을 한다고 합니다. 호세 마르티네스는 우리나라 서재필 박사 같은 분입니다. 백성들이 잠자고 있을 때 쿠바의 독립을 이야기하고 쿠바의 정신을 일깨워준 작가이자 선지자입니다. 물론 쿠바는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고 미국이 해방을 선물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고 미국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선물을 받았죠, 남이 그런 선물을 줄 때는 그냥 주지 않습니다. 6.25 시절에는 3만 5천여 명의 젊은이들의 목숨과 바꾸며 지켜주었는데 우리라면 그냥 주겠습니까? 미국은 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우리를 지켜주었지만 우리는 한 일이 너무 없으니 초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세 마르티네스 탑 광장 맞은 편에는 체 게바라가 콩고로 떠나며 보낸 편지 “승리를 향한 영원한 전진”이라는 문구가 벽에 걸려있는 내무부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체 게바라는 영구 혁명을 꿈꾼 어린 왕자입니다.

 노래와 춤, 사랑과 혁명이 있었다고 하는 땅 아바나, 3일로는 충분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아바나의 밤이 깊어갑니다. 체 게바라는 “담배는 고독한 혁명의 길에 가장 훌륭한 동반자“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의 고독과 열정을 달래준 시가, 평소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오늘은 고독한 한 남자의 심장을 느껴보기 위해 한 대를 쭉 빨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