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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 체 게바라를 기억하는 산타클라라

 “나는 끝나지 않은 노래를 부르며 슬픔을 무덤까지 가져가리라” 쿠바 혁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담긴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내며 체 게바라는 터키의 혁명시인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의 시구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時처럼 끝나지 않은 노래를 부르며 눈을 뜬 채로 슬픔을 무덤까지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볼리비아에서 사망한지 30년만인 지난 1997년,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습니다.

체 게바라를 사랑하고 체 게바라가 사랑한 땅, 쿠바 여행의 다섯째 날, 그를 기억하는 산타클라라로 향합니다. 체 게바라 평전을 쓴 장 코르미에는 “체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함께했다. 그는 바로 휴머니즘의 전도자였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진실 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스스로 단언했듯이 그는 인간으로서 진실 된 삶을 살았고 스스로 진실 된 인간으로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 기념 광장에 서니 오늘날 쿠바는 혁명의 색이 빠졌다고 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숙연한 마음과 혁명의 열의가 느껴집니다. 광장을 지나 기념관에 들어가려니 카메라는 물론 작은 돈, 가방도 지니지 못하고 모두 맡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열로 입실하며 멈추지 않고 정해진 방향으로 조용히 참관하라며 주의를 줍니다. 오래 전의 기억이지만 호치민 참관을 위해 줄을 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도 일열로 줄을 서고 팔을 힘차게 흔들며 광장을 가로질러 참관실로 들어갔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영웅을 접견하는데 그 정도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 때 아주 힘차게 팔을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호치민의 인자한 모습, 레닌의 엉뚱한 모습, 모택동의 우아한 모습 제가 본 세 명의 사회주의 영웅에 대한 느낌은 이렇습니다. 레닌은 세 번씩이나 옮겨 다니느라 사후에도 고생한 것이 보이고 조모가 몽골계이다 보니 유럽적이기 보다는 동양적인 색채가 강해 저에겐 엉뚱하게 느껴졌습니다. 체 게바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는 사망과 동시에 방부 처리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아니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혁명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남겨진 건 작은 상자에 들어갈 만한 유골이 전부이지만 그것이 그에게 알맞은 모습이어서 좋았습니다. 하얀 벽에 얼굴이 그려진 동판이 걸려있고 그 옆으로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30여 명의 부조가 걸려 있습니다. 그의 영면은 벽 뒤에 동지들과 함께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념관을 나와 안내자와 나무 그늘에 둘러 앉았습니다. 그의 설명과 함께 체 게바라에 대해 가장 잘 기록한 책으로 평가받는 장 코르미에가 지은 “체 게바라 평전”을 통해 쿠바에서 일어난 한 시대의 사건을 집어 봅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법대 학생 시절부터 학생 운동에 참여할 만큼 현실 정치에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바티스타가 쿠테타를 성공하면서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킵니다. 이 때 그의 당선도 무효가 됩니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의 일단을 보는 듯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1961년 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으로 당선이 취소되었습니다. 당선은 취소되었지만 국회의사당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두 거인은 군부독재 타도 투쟁을 시작합니다.

카스트로는 1953년 호세 마르티네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무장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그 때 진압군은 현장에서 군인 한 명이 죽으면 열 명을 사살하는 즉결 처분을 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죽을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델 카스트로를 잡은 분대의 분대장이 그의 초등학교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즉결 처분을 하지 않고 체포하여 법정으로 넘기게 됩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정식 재판을 받았고 15년 형을 받습니다. 그는 변호사로서 스스로를 변호하며 “역사가 나의 무죄를 입증할 것이다.”라고 변호하며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그는 재판을 통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바티스타 정권은 여론을 의식해 그를 2년 만에 석방하여 멕시코로 추방합니다. 당시 멕시코는 1921년부터 제도혁명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중남미의 혁명가들은 뿌리가 비슷한 멕시코에 모여 혁명의 꿈을 키워가던 시절입니다. 혁명에 목말라 있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만남도 멕시코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체 게바라는 군의관 신분으로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에 참가합니다.

1년간 동지를 모으고, 타고 갈 배와 무기를 구입하며 쿠바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11월에 2명의 행방이 묘연해집니다. 출발일이 누설되었다고 판단한 카스트로는 11월 25일, 급하게 동지들을 불러 출발을 서두릅니다. 그 때 총 85명이 모였는데 배는 최대 정원이 82명이어서 몸무게 순으로 3명을 탈락시키고 82명만이 쿠바로 출발하게 됩니다. 쿠바로 향하는 배에는 이태리인, 멕시코인, 도미니카인, 아르헨티나인, 체 게바라 등 4명의 외국인이 올라탑니다. 당시 멕시코가 남미 혁명의 중심지였고 얼마나 다양한 혁명 전사들이 활동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멕시코를 출항한 배는 멕시코만을 지나며 풍랑에 휩싸이게 되고 당시 너무 많은 대원들과 짐을 실은 탓에 제대로 된 속도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지원군과 만나기로 한 지점에 도착하지 못하고 좌초하고 맙니다. 일주일 만에 해안에 좌초한 혁명군은 망그로브 숲과 늪지를 헤쳐 나오는데 기진맥진 해졌습니다. 망그로브 늪지를 겨우 빠져나와 인원을 확인하니 8명이 부족합니다. 숲에서 길을 잃고 실종된 것입니다. 카스트로와 혁명군은 쿠바 남부의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향해 행군을 계속합니다. 산으로 숨어 들어가야지만 목숨을 건질 수 있고 살아야만 혁명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은 폭이 50km, 길이가 130km에 달하는 쿠바 제일의 산악 지대로 최고봉 투르키노봉은 해발 2,000m가 넘습니다. 그런데 좌초한 배를 발견한 어부가 해안 경비대에 신고하게 되면서 정부군이 뒤를 쫓기 시작합니다. 산으로 숨어든 혁명군은 추격군을 겨우 따돌리고 ‘타토베기’라는 농부의 길 안내를 받아 산자락의 사탕수수 농장에 몸을 숨깁니다. 혁명군은 3일 만에 처음으로 잠을 청하므로 깊은 잠에 빠집니다. 그런데 타도베기는 그 순간 농장을 벗어나 정부군에게 혁명군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다시 정부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아 대원들이 산으로 흩어질 때 체 게바라는 앞에 놓인 두 개의 상자를 놓고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는 의료 상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탄약 상자인데 두 개의 상자를 나를 수 없었던 그는 탄약과 약품 앞에서 ‘나는 의사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는 결국 탄약 상자를 들고 산으로 뛰었습니다. 이는 그의 혁명 의지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고 그의 인생은 이 날 정해진 바나 다름 없습니다. 그는 의사이기 전에 혁명 전사였습니다. 이 날 공격으로 포로가 된 21명은 다음 공격이 시작되기 전 처형되었고 다른 20여 명은 포로가 되어 아바나로 이송됩니다. 그렇게 동료들은 줄어들었고 12월 중순 게릴라를 완전히 소탕했다고 믿은 군이 시에라 마에스트라산에서 철수했을 때는 12명 만이 남았습니다. 12라는 숫자는 참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말한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12라는 숫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숫자입니다. 1874년 산 로렌조에서 스페인에 맞서 무장 투쟁을 일으켰던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피데스는 “우리는 열 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쿠바의 독립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하고도 남는 수이다.”라고 외치며 혁명의 불씨를 피웠습니다. 카스트로도 12명밖에 남지 않은 동지들에게 말했습니다. “해방자나 순교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25개월 만에 그들은 쿠바의 해방자가 됩니다. 요술을 부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 12명의 남은 사람들이었고 12척의 배였습니다. 그러니 숫자 12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숫자임이 분명합니다. 예수에게도 12명의 제자가 남았고 세계를 품었습니다.

카스트로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시급한 것은 농민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뢰는 거짓된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자발성, 진지함, 지성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는 그 일에 적임자가 체 게바라인걸 알아차립니다. 체 게바라의 인간적 진실정과 지성은 의사를 본적이 없는 농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그의 인격은 농민을 감동시켜 농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어냅니다. 모택동의 농민 사랑은 전술적 접근인데 반해, 체 게바라의 농민 사랑은 실천이며 그의 농민 사랑은 진심에서 나오는 행동이었습니다. 그의 생명 중시, 인간 사랑의 의지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 때에도, 8 대대 대장으로 아바나로 진격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재미로 살상하지 않는다. 적을 대할 때조차 인간을 존중하는 자세여야하며 승리한 뒤라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체는 이점을 부하들에게 주지시키며 전투를 해나갑니다. 동료가 죽어 가는데 적을 인간으로 대하라는 지침은 너무도 지키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지켰고 투항한 군대가 무장 해제된 후에는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대부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 그의 덕행이 입소문을 타고 바티스타군에 전염되면서 아바나로 향하는 그의 8 대대는 작은 전투 몇 번을 제외하고는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정부군은 체 게바라의 투항 권유를 받으면 훨씬 많은 병력과 무기를 가졌음에도 전투 한 번 해보지 않고 투항하는 군대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혁명군으로 옷을 갈아입고 혁명의 대열에 동참하는 군인이 늘어납니다. 총 한 번 쏘지 않고 승리하는 전쟁이 대승이라고 하니 대부분의 전투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하는 체 게바라는 훌륭한 전술가, 실천하는 고결한 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을 아군으로 돌리는 그의 탁월한 인성은 후에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바코드가 되었습니다.

1958년 8월 21일 혁명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을 내려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며 아바나로 향합니다. 2개의 대대(8 대대와 2 대대)로 편성된 혁명군은 두 개의 루트로 아바나로 향하는데 산타클라라는 두 부대가 거쳐가야 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도시입니다. 따라서 정부군과 혁명군은 산타클라라에서 만날 수 밖에 없고 산타클라라는 양측의 한 판 승부처가 됩니다. 여기서 혁명군이 승리하면 아바나까지 한숨에 진격이 가능하고, 정부군이 승리하면 혁명군 잔당을 소탕하는 식으로 전투가 마무리될 운명에 처합니다. 혁명군은 정부군 초소 12곳, 지방 수배 부대와 경찰서 다수, 8곳의 도시, 6곳의 군 주둔지를 접수하며 천천히 산타클라라로 접근해옵니다. 혁명군은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려고 국민의 지지와 혁명 동참을 촉구하고 바티스타는 군병력과 무기를 산타클라라로 보내 혁명군을 산산조각 내겠다며 국민 여론을 잠재우는 방송으로 국민의 동요를 진정시킵니다. 이렇게 여론전이 계속되며 산타클라라는 전술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양측이 물러설 수 없는 격전지가 됩니다. 하지만 병력으로 보면 둘의 대결은 무모해 보입니다. 산타클라라에 집결된 혁명군은 364명인데 비해 정부군은 4,000명이나 되며 이에 더해 장갑 열차와 공군 폭격 지원 등 무기가 월등합니다. 체 게바라가 “게릴라는 밤의 전사다.”라고 말했듯이 야습으로 정부군의 우수한 무기를 무력화시키며 천천히 산타클라라를 목졸라 갈 무렵, 바티스타가 보낸 장갑 열차가 산타클라라로 온다는 정보가 들어옵니다. 장갑열차가 들어오면 충원된 병력과 장갑차로 무장한 정부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체 게바라는 철로를 파괴해 기차를 탈선시키고 화염병을 투척해 장갑 열차를 화염에 휩싸이게 합니다. 결국 22량이나 되는 장갑에 가득한 무기와 정부군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투항합니다. 그리고 이들도 무장 해제 후 풀려나자 많은 병사가 체 게바라에 감동하여 혁명군에 동참하게 됩니다. 반면 장갑 열차만을 기다리던 정부군은 장갑 열차가 탈취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전의를 잃게 됩니다. 체 게바라는 사기가 저하된 정부군을 공격하기 보다 군주둔지를 직접 찾아가 ‘역사의 편에 설 것인가, 역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인가’ 지휘관을 설득하여 투항을 권유했으며 정부군의 투항으로 새해 첫 날 산타클라라는 혁명군의 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일요일 새벽, 마침내 아바나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란마호를 타고 멕시코를 떠난지 25개월 만에 이룩한 쿠바의 혁명은 그렇게 한 명의 주인공을 탄생시키며 끝이 납니다.

 산타클라라를 접수한 후 2 대대(2 대대와 8 대대)를 지휘한 카밀로와 체는 시내를 걸으며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가 이긴 뒤 뭘 해야 될지 알 것 같네.” “그것이 무엇이냐.” “나는 자네를 우리에 넣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관람료를 받고 자네를 보여주겠네.”

그는 대중의 영웅이자 우상이었습니다. 그를 우상으로 만든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양심과 고결한 인격, 그리고 이를 행동에 옮긴 실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체의 승리는 혁명가로서의 승리이며 인간의 승리라고 말합니다. 산타클라라는 녹슬지 않은 혁명의 영혼이 울려 퍼지는 곳이었습니다. 기념관을 떠난 차는 철로에 잠시 멈춰섭니다. 그 유명한 장갑 열차에서 한 장을 찍고 차에 다시 오르니 이번엔 광장에 데려다 놓습니다. 카밀로와 체가 어린애 같이 어깨동무하고 걸었던 광장, 환호하는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자유의 기쁨을 누렸던 광장, 해가 어둑하게 질 때까지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옆 벤치에 앉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60년 전의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어두워질 때까지 저와 함께 벤치를 떠나지 않습니다.

SANTA CLARA 1
광장의 체 게바라 동상
SANTA CLARA 2
박물관의 유명한 장갑 열차

날이 어두워져 오늘 묵을 민박집을 찾아갑니다. 동네 이장님쯤 되어 보이는 집에서 지도를 받고 오늘 하루 신세 질 집을 안내 받았습니다. 산타클라라는 작은 도시여서 마땅한 호텔이 없는 것도 그렇고 민박이 국가가 권장하는 숙박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웬만한 모텔보다 시설이 뒤떨어지지 않고 무엇보다도 집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좋습니다. 집을 배정받고 첫 인사를 건네니 부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고 딸은 그런 엄마를 돌보느라 병원에 있다고 아쉬워합니다. 저도 몹시 아쉬웠습니다. 무뚝뚝한 아저씨가 아닌 젊은 아가씨가 차려주는 저녁을 기대했었거든요, 민박은 여러 가지로 색다른 추억을 선사합니다. 25년 전 폴란드에서 민박을 했을 때에는 같은 또래의 여주인과 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그녀는 8살의 딸을 둔 이혼녀였지만 그 집에 머무는 며칠간 집안의 남자가 된 듯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루미나아에서 민박을 했을 땐 그 집 아들과 형, 동생하며 가까워져 시골 할아버지네로 함께 내려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에서 얼굴 다른 사람이 왔다고 동네 아가씨들이 두리번거리며 수줍어하던 모습과 저의 설레는 마음이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추억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지금도 추억을 꿈꾸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주머니의 수다와 아저씨와 건네는 럼 한 잔, 그런 모습이 궁금해 들락날락 거리는 어린 딸, 그런 상상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래도 쿠바의 민박은 인심이 넘치는 수다가 있는 그런 곳입니다.

체 게바라는 혁명 정부의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도 혁명의 에너지는 식지 않습니다. 편안한 삶을 살기에 그는 너무 순수했는지 모릅니다. 콩고로 떠나며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 평의회에 편지를 한 통 보냅니다. “승리를 향한 영원한 전진”, 그리고 콩고로 떠납니다. 콩고에서의 혁명은 그리 순탄하지 않습니다. 그가 선택한 대상은 탕가니카호 서쪽 연안 산지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조직이었고, 이 조직은 26세의 로랑 카빌라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카빌라의 반란군은 오합지졸인데다 부족간의 갈등으로 사분오열이 되어 있고 지휘관들은 혁명보다 호수 건너의 키고마의 술집과 사창가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타락한 집단이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하나의 대륙이고 하나의 문화이며 하나의 언어와 이상을 가진 남미 대륙에서 혁명을 성공했지만 아프리카는 모든 것이 남미와 달랐고 그는 결국 포기하고 콩고를 떠납니다. 체 게바라는 콩고를 떠난 뒤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인민 해방군은 기본적으로 기생충 같은 군대였다.” 혁명의 탈을 썼을 뿐 타락한 인간들이 벌이는 혁명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운지 눈으로 보고 깨우칩니다. 그리고 체 게바라는 말합니다. “혁명가는 숭고한 이상과 양심을 잃으면 남은 건 빈손이다.”

 콩고에서는 실패했지만 체 게바라는 빈 손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만델라의 서신을 받고 그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몇 시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양심적인 흑인과 양심적인 백인과의 만남은 역사의 다음 장을 열어갑니다. 어떤 분은 여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페이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비로소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다.” 체 게바라가 콩고로 혁명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콩고의 카빌라에게 실망해 귀향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델라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거친 역사의 물결을 일으키게끔 둘의 만남은 운명처럼 이루어졌고 체 게바라는 만델라의 이야기에 공감하여 남아공에 평화를 선물하게 됩니다. 쿠바로 돌아간 체 게바라는 쿠바 유엔대사 자격으로 유엔에서 연설을 하게 되고 이 때 남아공의 비인도적인 인종 분리 정책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제 3세계가 이에 동조하면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제 3세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해 결국 남아공 경제 제제에 동참하게 됩니다. 고립된 남아공은 경제난을 이기지 못하고 백인 정권이 스스로 흑인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무혈 혁명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납니다. 체 게바라는 콩고에서 실패한 혁명을 그만의 방식으로 남아공에서 성공시킨 것입니다. 그는 다음 행선지를 볼리비아로 정하고 동지들과 혁명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승리를 위한 영원한 전진은 멈추게 됩니다. 외로운 체 게바라에게 영원한 휴식이 주어진 것입니다. 카빌라는 호수 건너 사창가를 찾아가며 체 게바라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Acha Inwe Dogedoge Siachi”아차 인데 도게도게 시애취), 스와힐리어로 “죽일 테면 죽여보라지. 그래도 나는 절대로 젊은 여성을 포기할 수 없다.”라는 뜻이라는데 에이즈가 밝혀진 후 에이즈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카빌라는 알고 있었을까요, ‘내가 에이즈에 걸려 죽듯이 넌 총에 맞아 죽을거야, 우린 멈추지 못하기 때문에…’

 체 게바라는 왜 쿠바에서만 성공했을 뿐 콩고나 볼리비아에선 초라한 존재가 되었을까요, 중미 여행을 같이한 어느 의사는 일 년에 한 번 오지 마을로 의료 봉사를 가는데 약을 전혀 가져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병을 피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의료 혜택이 지속적이지 않는 한 어차피 약은 곧 없어지고 그들은 같은 방식으로 살다 같은 병으로 괴로움을 당할 테니까요, 그들에게 필요한 건 병이 왜 왔고 병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설명입니다. 병원 천막이 아닌 이장 집에서 터를 잡고 밥을 얻어먹다 보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든다고 하던데, 그들의 손에 닭과 낱알이 들려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머물고 오면 그 동네가 바뀐다고 하니 체 게바라가 그리하지 않았을까요, 무언가를 해주기 보다는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줄 때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고, 쿠바에서 체 게바라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만 의사였을 뿐 콩고나 볼리비아에서는 혁명에 목멘 투사였고 전사였습니다. 콩고와 볼리비아에서의 실패는 혁명의 실패가 아닌 따뜻하게 다가가지 못한 인간애의 실패였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