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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무어랜드에서 만난 늙은 소년

리치몬드에서 택시를 빌려 오스모덜리(Osmotherley)로 향했다. 오스모덜리는 헤더(heather 산철쭉)로 가득한 무어(Moor 황무지 평원)랜드의 심장이라고 알려진 작은 마을이다.

오전 10시, 숙박지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니 웃통을 벗고 반바지만 입고 나온 남자는 배가 불룩하고 털이 북슬북슬하다.
“방은 1시간 넘어야 준비가 가능한데..”
“괜찮습니다. 택시를 타고 오다 보니 능선에 헤더가 만발하던데, 거기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는지요?”
난감해하던 남자는 잠시 기다리라며 집으로 들어가서 지도를 들고나왔다.
“여기, 걸어갈 만한 거리이긴 한데..”
“얼마나 걸릴까요? 택시나 버스는 없을까요?”
남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어려운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다시 집으로 들어간 남자는 자동차 키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헤더가 만발한 무어랜드의 심장에 데려다주었다.
“걷고, 또 걷고 돌아오세요. 세상에 하나뿐인 붉은 심장이라오.”

들판은 짙은 구름 아래 숨죽이고 하늘거렸다. 그런데 영국의 하늘이 믿을만하던가.. 구름이 짙다가도 해가 쨍쨍 쏟아지고 다시 구름이 태양을 감추어 버리지 않는가. 구름과 해가 번갈아 대지를 뒤덮어서 헤더 동산은 검붉다가 환희의 갈채로 만발한다. 하지만 이내 또 짙게 움츠러든다. 동산의 헤더는 태양이 비싼 영국의 하늘을 이미 잘 익힌 모양이다. 잘 다듬어진 길을 걸어 동산의 정상에 올랐다.

동산은 하나의 시작점이고 헤더가 덮은 대지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대하다. 헤더는 폭풍우에 잘 어울리는 야생화다.
에밀리와 샬롯은 헤더를 사랑했고 헤더가 만발한 언덕을 매일 걸었다. 자매가 걸었던 동산의 끝에는 폐가가 있었고 폐가를 지키는 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나무가 얼마나 고독했으면 기괴한 상상의 주체가 되었을까. 요크셔 지방의 명물, 헤더는 영국 문학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헤더는 관목 과로 우리나라 산철쭉에 가깝다.

내가 기억하는 1983년 한라산의 만세동산은 철쭉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오래된 상상의 멋이 아니던가. 한데 영국의 헤더는 에밀리가 폭풍의 언덕에서 그려내 그 모습 그대로 여전하다. 200여 년이나 지났건만..

200년동안 변함없는 무어랜드
헤더. 산철쭉의 종류
헤더군락지 근처의 양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만난 주인집 남자는 어제의 배불뚝이가 아니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을 입고 앞치마를 목에 걸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태도가 아주 고급스럽고, 세련되었다.
영국 여행을 하며 게스트 하우스, 호텔, 롯지, 고성 등 다양한 숙박지에서 묵었지만 가장 정성스럽고 고급스러운 집이다. 식당 벽에는 수채화와 묵화 등 여러 그림이 걸려있고 특히 배 그림이 많다. 나는 어제의 호의도 그렇고 아침의 변신도 그렇고 주인집 남자가 궁금해졌다.
“실례 같은 질문인데요. 혹시 배를 타지 않았나요?”
“어떻게 알았죠? 컨테이너선 선장을 하다 얼마 전 은퇴했어요.”
배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띠는 남자는 패드를 가져와 자신이 탔던 배를 보여주고 정박했던 한국의 여수항에 대한 인상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 이 집을 팔고 요트를 살 겁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날 거예요.”
하나뿐인 애가 이제 겨우 초등학교 다닐까 말까 하는 어린 나이라서 좀 의아했다. 남자의 나이가 꽤 많아 보여서다.
“영국은 은퇴를 몇 살에 하나요?”
그는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자신이 59세(한국 나이로 60세)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아이가 어리다면,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결혼을 늦게 한 게 아닌지.. 50이 넘어서?

나이가 50이 넘도록 세상을 돌아다니고도 부족해서 집을 팔아 요트를 사서 다시 여행을 꿈꾸는 60세의 남자. 참 대화할수록 궁금한 사람이다.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아직 소년 같은 남자인가.. 남자는 여행 이야기를 시작하며 옆에 아주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패드를 열어 자신이 살 요트를 보여주었다.

120만 유로(약 15억) 주고 살 예정인 요트는 프랑스 남부의 조선소에서 만들어서 영국으로 가져오고 자신은 연말에 집을 팔고 그 대금으로 요트 값을 지불한 후 여행을 떠날 거라는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5년간을 예정하는 그의 여행은 영국에서 출발해서 미국 동부와 남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며 멕시코 만을 지나고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서 칠레 해안을 따라 파타고니아까지 내려간 후 호주로 이어진다. 그 후의 일정은 미정이라고 한다. 호주에는 동생이 살아서 얼마간 머물다가 영국으로 돌아올 예정인데 항로를 아직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마젤란이 그랬듯이 태평양과 인도양을 지나고 아프리카를 돌아 영국으로 가면 어떠냐고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영국으로 돌아오면 이번엔 요트를 팔고 집을 사서 다시 펜션을 운영하겠다는 60살의 꿈꾸는 소년. 나는 그의 아내를 살폈다. 큰 불만 없이 함께 할 거 같은 온화하고 푸근한 모습이다.

새로이 무언가를 꿈꿀 수 있는 나이로 60살은 그리 늦지 않은 것인가? 그에게 질문하지 않았어도 그의 답을 알 수 있었다. 60은 새로이 무언가를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이죠.. 행동이 좀 느리면 어떤가?
꿈을 향해 가는 게 중요하지.. 내년 1월 1일이 되면 오스모덜리의 늙은 소년은 어린 딸과 부인을 자신의 요트에 태우고 다시 바다도 나갈 것이다.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지난 시간과 다른 바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