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경석의 여행이야기  > 11화 : 탐험의 도시, 밀수의 도시

11화 : 탐험의 도시, 밀수의 도시


휘트비로 떠나는 나에게 오스모덜리의 늙은 소년은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를 놓치지 말라고 한다. 그가 알려준 식당은 영국 10대 식당에 꼽혔다는 ‘The Magpie Cafe’이다. 식당을 찾아가 보니 수리 중이라고 영업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식당 한쪽에 Take way(우리나라의 테이크 아웃)를 운영하고 있다. 명태(Cod), 대구(Haddock), 소형 랍스터(Scampi)를 주문해서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테이크 아웃으로 식사를 주문하니 금액이 아주 저렴하다. 감자를 뺐다지만 3가지를 모두 합해도 13.9파운드(21,000원)밖에 나오지 않는다. 식당에서 한 끼니에 보통 20~30파운드 사이를 지불한 걸 생각하면 반값도 안 되는 것이다.

배를 든든히 채웠으니 휘트비의 명소를 찾아 순례했다. 우선 부둣가 방파제를 걸어 쿡 선장의 기념 동상을 찾았다.

18살에 휘트비에서 실습 선원 생활을 시작한 쿡은 9년간 여러 나라를 오갔다. 쿡은 주변 나라를 오가면서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보다 넓은 세상으로 꿈을 펼쳐나갔다. 그의 탐험은 여기 휘트비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험한 항해를 마다하지 않은 그의 동기는 무엇일까? 단지 모험정신이었을까? 탐험 비용은 누가 대주었을까?

마젤란은 육두구(향신료로 쓰이는 미리스티카 프라그란스의 씨)를 얻으려고 지구를 한 바퀴를 돌았다. 콜럼버스도 향료를 얻으려고 무모한 항해에 올라 라틴아메리카 발견이라는 역사적인 항해를 남겼다. 두 탐험가로 인해 대서양과 태평양은 이미 인식의 범주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 범주는 좁았고 미지의 공간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쿡 선장이 탐험을 시작하기 전까지 태평양의 많은 섬과 남극대륙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쿡 선장의 열정에 의해 하나둘 발견되었고 이로써 지구촌의 지리적 규명은 종착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쿡 선장은 왜 태평양을 샅샅이 훑고 다녔을까?

1769년 1차 탐험대를 이끌고 휘트비 항구를 떠난 쿡 선장은 밀봉된 채 전달된 정부 문서를 뜯었다..

 -남극대륙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

쿡 선장의 탐험은 영국 정부의 정책적 희망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가 가장 유능한 적임자였다. 쿡 선장은 하나둘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였고 영국 해상 지식과 자신의 영광을 세상에 깊게 새겼다. 그런데 남극이라는 땅을 영국 정부는 어떻게 추측해낼 수 있었을까?

영국의 저널리스트 윌리엄 핸콕의 주장에 따르면 1513년에 오스만의 제독 피리 레이스는 해도를 1장 남겼는데, 그 지도에는 남극대륙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영국 정부는 남극대륙이 있다면 이 대륙에도 깃대를 꽂아 영지를 넓히려 한 모양이다. 당시는 선점 주의 시대였고 선점 주의 시대엔 누구나 신대륙을 발견하면 교황청에 영토로 인정받는 지리상의 탐험 시대가 아니었나..

쿡 선장 동상
항구

하지만 더 이상 발견할 땅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선점을 위한 치졸한 다툼이 벌어졌고 이를 유럽의 불안이라고 본 비스마르크는 세계 27개국의 열강을 베를린으로 불러 세계지배 질서의 축을 선점 주의에서 실효 주의로 바꾸는 베를린의 정서를 이끌어냈다. 비스마르크의 노력이 1차 세계대전을 막지는 못했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포경산업의 중심지임을 알리는 고래뼈로 만든 아치 대문에서 드라큘라의 영감을 준 파괴된 수도원을 바라보고 부둣가로 내려와 쿡선장의 항해를 체험하는 짧은 뱃놀이를 한다. 갤리선의 모형을 한 배는 차갑고 거친 북해의 물살을 가르며 바다로 나갔다가 부두로 회항하는 짧은 항해를 맛보여준다. 짧은 항해인데도 파카를 꺼내입을 만큼 북해의 바다는 차고 매섭다. 북극해 항로를 개발한 위대한 쿡 선장은 북해도 아닌 북극해의 파도와 추위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위대한 항해에 고개가 숙여진다.

마지막으로 수로를 건너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의 영감이 되었다는 성 마리 수도원(St Mary’s proity)으로 향한다. 드라큘라 백작은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브란 성의 성주로 알려져 있다. 성주는 지나가는 상인을 잡아 잔인하게 죽였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즐겼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이미지와 파괴된 수도원과 공동묘지의 스산한 분위기는 작가로 하여금 절대 고독에 갇힌 한 인물을 만들어내게 했다. 밤에만 활동해야 하는 어둠의 존재. 영원히 죽을 수 없는 고독한 존재, 결국 드라큘라는 주어진 업보를 견디기 위해 결국 자신을 신으로 만들었다. 그는 말했다.

 We learn from failure, not from successes (우리는 성공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실패에서 배운다.).

수도원을 지나면서 로빈 후드 베이로 향하는 트레킹을 시작한다. 해안을 따라가는 10km의 부드러운 트레킹이다.
아일랜드 해안에 접한 세인트 비즈에서 첫 해안 트레킹을 했고 북해에 맞닿은 해안에서 마지막 해안 트레킹을 한다. 세인트 비즈에서 CTC가 시작하고 로빈 후드 베이에서 CTC가 끝나기 때문이다. 해안 트레킹은 시야가 시원해서 좋고 마음이 행복해서 좋다. 길은 평온하고 주변이 고요하다. 이런 길이라면 온종일 걸어도 피곤하지 않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아쉬움에 수도 없이 뒤를 돌아본다. 뭔가 놓고 온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주어 올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쉬움이란 그런 게 아닌가. CTC의 마지막 구간이 뒷머리를 잡고 놓지 않는가 보다.

막바지를 향해가는 길
휘트비로 향하는 길

해가 기울어가는 시간에 로빈 후드 베이에 닿았다. 왜 로빈훗 베이라고 이름 지었을까? 로빈후드는 압박하는 왕실 군대를 피해 이 포구에서 배를 타고 탈출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로빈 후드 베이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로빈 후드는 왜 왕실 군대의 쫓기고 핍박을 받았을까?

로빈훗은 셔우드(Sherwood)의 숲속에 은거하며, 귀족ㆍ승려 등을 습격,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의적이다. 그런데 정부입장에서 보면 그가 유통시킨 물건은 일종의 장물이고 밀수품인 것이다. 그는 거의 공짜로 또는 아주 저렴하게 백성에게 물건을 건네주었을 테고 로빈훗이 물건을 사람들에게 건네주면 줄수록 세금이 줄어들고 왕실의 창고가 비었을 테니 왕실이 그를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로빈훗은 영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 항구가 이 포구라니.. 그런데 로빈훗 베이는 영국의 대표적인 밀수 항이라고 한다.

밀수는 정녕 나쁜 거래인가? 현재는 대부분의 상품이 자유 거래로 이루어지고 밀수는 마약 같은 특정품에 한정되어 있지만, 물자가 부족한 시대, 밀수의 기능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밀수는 독점에 저항한 무역 형태로 정상적인 무역이 감당하지 못하는 빈틈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세금을 거두려는 정부에 의해 나쁜 행위로 규정되었지만 배고픈 서민에게 경제적으로 유익한 면이 많았다. 밀수는 어느 정도의 독점이 해소되고 세금이 낮아져 서민의 상품접근이 손쉬워질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밀수는 그런 변화를 가져온 주범이었다.

이를 오늘날엔 시장개방, 개방경제라고 하지 않나.. 영국은 네덜란드와 함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독점에 가장 강력히 저항한 나라이며 밀수로 경제적 부를 키워간 전형적인 나라였다. 특히 영국은 밀수를 넘어 스페인의 부를 강탈해서 부를 키운 해적의 국가가 아닌가. 로빈훗이 의적이었듯이 밀수업자도 주머니가 빈약한 서민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의로운 사람들일 수 있다. 물자가 부족했던 19세기까지는..

그러니 로빈훗이 사랑받듯 로빈훗 베이도 사랑받는 마을이 아닌가.. 로빈훗 베이에 있는 CTC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카페에 닿았다. 그 집 벽에는 ‘End of CTC. 192mile’이라고 큰 글씨를 써 두었다. 맥주를 한잔 들고 사진을 남기니 정말로 309km를 다 걸은 듯 뿌듯하다. 중간중간 빼먹고 건너뛰고 이탈도 하였는데, 시작점과 끝을 이었으니 그래도 증명된 것이 아닌가.. 난 완주한 기쁨에 맥주를 계속해서 마셨다.

CTC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카페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