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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세인트 비즈(St Bees)에 도착한 첫날은 비가 내렸다. 작은 시골 마을은 오가는 사람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아일랜드 해(Irish ocean)는 청명하지는 않지만, 파도가 거품을 품었다가 삭이고 포말 지며 솟구치는 바람이 은밀하게 옷 속을 파고든다. 바람이 선선해서 무더운 한국의 여름을 날려버릴 멋진 향연이다. 바닷가를 거닐며 이 길을 처음 소개한 앨프리드 웨인라이트(COAST TO COAST, 일명 CTC로 불리는 트레일을 전 세계에 알린 여행작가)를 그려본다. 그는 인생 전체를 CTC를 소개하는 데 바쳤다. 그에게 CTC는 종교였을 것이다. 나에게 CTC는 무엇인가? 왜 이 먼 타지에까지 찾아와 CTC를 이야기하는가? CTC의 시작점 세인트 비즈(St Bees)에서 처음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왜 나는 CTC를 걸으려 하는가?

 밤사이 비가 내리더니 아침은 햇살이 반갑게 맞이한다. ‘COAST TO COAST’가 시작되는 기념비에서 사진 한 장을 남기고 해안 절벽까지 거칠게 내달린 초원지대를 걷는다. 해안 절벽은 바다와 수직으로 마주 서 있고 흔들리는 초지가 두툼하게 대지를 덮고 있다. 바다와 마주하는 해안절벽의 단층은 200만 년 전 만들어진 붉은 진흙암이다. 세인트 비즈에서는 이 돌을 채취해 교회와 성을 지었고, 세인트 비즈의 고색창연한 건물들 역시 반듯하게 깎은 블록으로 지어져 있다. 고색창연한 건물들은 마을의 유래와도 연관이 있다. 1,300년 전 아일랜드의 왕에게는 베가(Bega)라는 딸이 있었다. 베가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신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굳게 결의했으나 바이킹의 침공에 시달리던 아일랜드 왕은 노르웨이 바이킹 왕자에게 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배를 타고 수녀들과 아일랜드를 탈출해 동쪽의 땅에서 종교적 삶을 이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바다로 나간 배는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고 겨우 방주에 의지해 표류하다가 여기, 세인트 비즈에 닿았다. 세인트 비즈가 아일랜드에서 30마일(약 48.2km)밖에 안되는 지척이 아니었으면 베가 일행은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베가는 어려운 주민을 돕는데 일생을 바쳤고 그녀의 종교적 헌신을 기억하고자 하는 주민이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인 비즈(Bees)를 마을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CTC STORY3
CTC가 시작되는 기념비
마을에 세워져 있는 비즈의 동상

 CTC를 시작하는 첫 마을 세인트 비즈가 이렇게 멋진 사연을 지니고 있어서 출발하는 기분이 성스럽기만 하다. 해안가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등산로는 해안선을 따라 완만한 구릉을 부드럽게 타고 넘으며 5.5km나 이어진다. 검은 바다와 푸른 초원 그리고 노랗게 바랜 호밀밭 등 각기 다른 짙은 색이 대지를 덮고 있어서 색동저고리 치맛자락같이 바람에 오색이 출렁인다. 오색의 대지를 걷는 트레커는 치마에 그려진 꽃이거나 꽃과 꽃을 이어주는 나비일 것이다. 나비같이 초원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데, 시원하게 갈증을 풀어주는 바람이 귓불에 속삭인다. 대지와 바람과 얼씨구 춤을 추고 나니 정지용의 시 ‘향수’가 입가에 맴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의 향수 중에서 –

 영국의 서쪽바다. 색동저고리가 바람에 출렁이는.. 아 나도 이 대지를 지나고 나면 꿈엔들 잊을 수 있을까..

보라색의 헤더 군락지, 갈대와 호밀밭
구릉이 계속 이어진다

CTC의 첫날 트레킹은 용궁으로 향하는 미로에 들어선 기분이다. 푸른 융단이 정갈하게 깔린 들판을 가르며 길이 솟아있고 구릉을 넘으면 하늘로 이어질 듯 길은 구릉 위를 내달린다. 그렇게 하나의 구릉을 넘으면 곧이어 다음 구릉이 기다리고 구릉과 구릉이 연이어진 들판은 초록 배지에 꽃을 수놓은 고급 양탄자같이 꿈틀거린다. 들판은 무엇 하나 모호하지 않다.

초록의 들판, 붉고 노란 야생화 밭, 보라색의 헤더 군락지, 호밀밭, 그리고 갈색의 바다와 검은 비구름, 각자 위축되지 않는 모습으로 CTC의 길을 치장하고 있다. 햇살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와 대지를 화사하게 비추는 시간에 트레킹을 시작했다. 바다에 취하고 들판에 호응하며 2시간을 걸으니 팻말이 선명한 갈림길에 닿았다.
계속 직진을 알리는 방향 표시엔 해안이라고 쓰여 있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길엔 CTC라고 쓰여 있다. CTC를 찾아왔으니 나의 길은 오른쪽 길이다. 계속 동쪽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정지용의 시처럼 넓은 벌 동쪽 끝에서 끝날 CTC 마지막 포구 로빈후드 베이(Robin Hood’s Bay)까지..

해변가 짙은 색의 모래가 낯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