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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머나먼 지평선이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대지


맨체스터에서 고속 열차를 타고 세인트 비즈로 가던 중 CTC를 넘게 되었다. CTC는 우리나라 휴전선같이 동서로 이어져 있으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연결하는 기차나 고속도로가 CTC를 끊고 달리게 되어있다.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은 청량하고 시원하다. 가릴 거 없는 초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달리는 내내 답답한 앙금을 씻어내는 듯 후련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산이라기보다는 완만한 구릉이 아닌가? 산 다운 산 하나 보이지 않는 영국이지만 영국은 근대 알피니즘의 개척자였다. 알프스 3대 북벽 중 하나인 마터호른(Matterhorn)을 오르며 알프스 은(銀)의 시대를 열었고, 히말라야에서도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라 높이의 경쟁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등산 사조를 여는 데 한 획을 그었다.

항구에 정착해있는 배
깊은 산골짜기가 넓게 펼쳐져 있다.

야트막한 구릉, 양이 뛰노는 평범한 대지, 정상 능선에도 넓은 습지(Fell)가 펼쳐진 완만한 산세. 산이 이렇게 부드럽고 쉬운데 영국인들이 현대 산악을 이끌어 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만년설봉과 가파른 암봉, 빙하가 즐비한 알프스를 고향으로 삼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반가들은 영국 산악인이 한번 헤집고 지나간 뒤에야 알피니즘에 참여했다. 물론 더 높은 등반 가치를 실현했지만, 시작은 영국이었고 방향과 길목을 튼 것도 영국이었다. 영국 산악 협회는 ‘MOUNTAIN ALPINE FEDERATION’라고 쓸 뿐 영국이라는 국명을 표기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은 탐험,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며 오직 영국에만 허용된 영광이다. 우리나라도 한국을 붙여 대한 산악 연맹(KOREA MOUNTAIN ALPINE FEDERATION)이라고 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오스트리아 산악 협회도 오스트리아를 붙이지 않나. 오직 영국에 적용되는 건 영국이 시작이었고 그만큼 기여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어떻게 모든 분야에서 앞서 나갔고 근대 문화적 토양을 쌓아갔을까, 특히 변변한 산 하나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등산 운동을 선도해 나갔을까?

CTC는 세인트 비즈에서 로빈훗 베이까지 305km(192mile)를 걸어야 한다. 처음과 끝은 해안 트레킹이고 중심부는 완만한 요크셔의 구릉이다. 서쪽이 산악지역이라지만 3일이면 끝나고 산세가 완만하고 고도가 700m를 넘지 않는 산악지대라고 하기엔 부드럽다 못해 간지럽다. 반복적이고 여인네 품같이 부드러운 대지, 알프스같이 거친 너덜지대도, 가파른 암벽 구간도, 만년설빙의 위협도 없다. 도대체 영국 산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니 영국인들은 어떻게 현대 등산을 이끌어 갔을까.. 그런 질문과 의문이 가슴을 답답하게 할 때 나는 다시 대지를 눈여겨보았다. 머나먼 지평선이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시원한 대지.. 영국의 성장은 대지의 산물이 아닌지, 영국의 아이러니를 생각하며 다시금 나는 대지를 바라본다. 영국을 낳은 평범한 대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