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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소유한 자가 아닌 머무르는 자가 주인이다."


이틀을 그라스미어에서 묵고 다시 CTC를 걷기 시작해 글렌리딩(Glenridding)에 닿았다.
호숫가의 마을은 한적하다 못해 소박하다. 글렌리딩을 떠나면 레이크 디스트릿(Lake District)국립공원을 벗어나고 요크셔 달레(Yorkshire Dales) 국립공원에 들어선다. 요크셔는 영국 양모산업의 중심지였다. 영국 산업혁명은 초기 방직산업이 이끌었고 잉여생산물은 해외시장 개척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 영국 역사의 한 단면이 시작된 땅이다. 왜 요크셔는 어린 시절 양모의 대명사로 통했는지 궁금했는데 대지를 보니 그 의미를 알 거 같다. 거대한 구릉이 한도 끝도 없고 대지는 거대한 초원일 뿐이니 양들의 천국이 아닐 수 없다. 양들에게는 천국이지만 트레커에겐 어떤가, 완만한 구릉을 반복적으로 넘고 사유지를 돌아 포장된 마을 길을 걸어야 하고 트레킹으로서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구간이다. 나는 다음 행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백두대간도 이리저리 끊기고 개발되어서 걷기 좋지 않은 구간이 더러 있다. 우리나라 같은 산악지형도 아닌 들판인데 더하면 더했지 덜할까.. 비슷한 초록의 들판, 목초지를 하루 종일 걷는 게 의미 있을까? 양이라면 행복하겠지만, 인간인 나는..

난 영국 여행사가 꼼꼼히 짜준 일정표를 다시 살폈다. 걷는 거리와 구간 특징, 숙박지 등 그리고 결론에 도달했다.
나에겐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샤프(Shap) 마을로 연결된 CTC Trail을 이어가던가, 아니면 호수를 건너 하우타운(How Town)에서 뱀튼(Bampton)까지 이어지는 로마의 길을 따라 걷던가. 그것도 아니면 배를 타고 호수를 종단한 후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볼까.. 아침이 되어서 숙소를 나올 때까지도 일정을 정하지 못했다. 결정을 미룬 이유가 달리 있을까.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럼 방향을 바꾸어야지, 마음이 끌리지 않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닌 숙제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행선지를 바꾸었다. 잠시지만 CTC를 벗어나는 일탈을 꿈꾼 것이다.

선착장에 닿았으니 나는 배를 탈 것이다. 그리고 버스도 탈 것이다. 이렇게 나의 일탈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다음은 무엇인가. 호수를 건너는 동안 배 안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그러다 내릴 때쯤에야 맘을 정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로 나가보자.’ 배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며 커피를 한잔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펜리스로(Penrith)가는 버스가 30분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5분 남겨놓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버스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오더니 주저 없이 지나친다. 너무 당황해서 상점 주인에게 달려갔다.
“왜 차가 안 서죠?”
“팔을 흔들었나요? 이렇게.”

그는 두 팔을 들어 만세 자세로 흔들었다.
“네??”

버스는 정류장에서 손 흔드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보고 서곤 했지. 근데 벌써 30년도 전에 사라진 풍속 아닌가.. 다음 버스는 1시간 후라서 다시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펜리스가 유일한 버스 연결 종착역이지만 펜리스가 목적지는 아니지 않은가.. 고등학교 시절 답답할 때면 소래포구로 향하는 21번 버스를 탔었다. 소래포구는 종착역이었고 바다내음을 맡으며 들판을 걷곤 했었다. 하지만 40년 전 일이 아닌가, 4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목적 없이 방황을 하고 있다니.. 방황은 그 나이에 알맞은 장식이고. 지금의 나에겐 목적지가 있어야 하는 데, 여전히 목적지가 없으니..

“이 고장엔 볼거리가 무엇이 있어요?”
“당신은 무엇을 좋아해요?”
“저는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국적인 것을 느끼고 싶구요.”
“그럼 당신은 이곳에 가봐야겠군요.”

상점 주인은 카드를 하나 집어 주었다.
“1파운드인데, 커피를 3잔이나 마셨으니 선물로 드리죠.”
넓은 초원에 긴 돌담이 담긴 카드였다. 돌담은 CTC를 걷는 동안 계속 보아온 터라서 식상했다..
“돌담은 수도 없이 봤습니다. 너무나 수고스러운 일들을 영국인들은 했더군요. 그 인내가 감탄스럽기도 하고요. 집의 벽이나 담벼락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온 들판을 반듯하게 돌담으로 경계 지었더군요. 대단한 노고라고 생각합니다.”
“오, 이건 달라요. 당신이 본 돌담은 백 년 전에 쌓은 돌담이죠. 그러나 이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쌓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나누는 경계선이자 방벽입니다. 진정한 영국의 역사죠.”

로마는 잉글랜드를 지배했지만 무리하게 스코틀랜드까지 통치하려 하지 않았다. 로마가 방치한 스코틀랜드는 문명화된 잉글랜드를 자주 침범했고 이는 비문명 지대가 갖는 문명 대지를 향한 경향성 같은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잦은 침략을 막기 위해 5세기 로마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구분 짓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다. 방벽은 그런 의미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계선이자 문명 지대와 야만 지대의 구분선이며 영국의 숨겨진 내홍을 간직한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어떻게 가죠?”
“펜리스에서 버스를 타고 칼라일로 가고, 칼라일에서는 기차를 타고 핵섬으로 가면 돼요. 그리고 영국을 이해하려면 고성에서 하루를 묵어보세요. 영국은 무겁고 진지하거든요, 고성같이..”

새로운 목적지가 생겼다. 하드리아누스의 방벽… 그리고 스코틀랜드, 그리고 고성.. 난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두 손을 크게 흔들어 버스를 세우고 칼라일로 향했다.

영국 여행을 하며 갖고 있었던 의문이 있다. 영국 사람들은 정중하고 진지했다. 수다 떠는 사람을 볼 수도 없고 표정은 늘 굳어있다. 사람이 마주칠 때면 습관적으로 미소 짓고 인사를 나누지만, 형식적일 뿐이다. 이들에게 위안은 애완동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큰 개를 가족같이 데리고 어디든 다닌다. CTC 트레일에서도, 버스에서도, 심지어 호텔방으로도 데리고 간다. 날씨 때문일까, 영국의 날씨는 무거운 구름 사이로 쪽빛 태양이 비치고 그러다 간헐적으로 비를 뿌리고 다시 해가 나는, 터무니없이 혼란스러운 날씨다. 화창한 지중해 사람들의 밝은 인사성과 붙임성을 찾아볼 수 없는 영국 사람들의 묵직한 태도. 태양을 떠나보낸 후유증일까? 혹 예측할 수없이 역할을 바꾸는 비와 구름과 바람과 태양이 영국 사람들에 무언의 강요를 하지 않았을까..
무엇 하나도 명확하지 않다. 항상 조심하고 신중해라. 태양은 태양이 아니고 비도 비가 아니다. 언제나 하늘은 바뀐다. 그러니 진지하게 살피고 준비하라.
영국의 성취는 이런 배경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영국인 같은 고성을 찾아 방을 예약했다.

칼라일 역에서 택시로 45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18세기에 지어진 Springkell 호텔이다. 주인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대농장주이거나 지역 지배자의 집이었을 것이다. 잔디가 깔린 정원은 골프장만큼 넓고 3층의 건물엔 방이 12개밖에 안된다. 그러니 보통의 호텔과는 개념 자체가 다른 것이다. 방으로 안내되고 나는 다시 놀랐다. 천장은 보통 아파트의 두 배에 가깝게 높고 18평 아파트보다 넓은 침실엔 박물관에서나 보던 가구와 소파, 벽난로가 있다. 저녁 식사를 알리는 문 두드림에 식당으로 내려가니 손님은 9명 밖에 안된다. 이 넓은 저택을 대 여섯 명의 보필을 받으며 소유하다니.. 정원을 걸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머무는 3일간 이 집은 내 집이다. 집이란 소유한 자가 주인이 아니라 머무는 자가 주인이지 않은가?

영국은 그렇게 주인이 바뀌었다. 영국뿐이 아니다. 세상의 질서가 그렇지 않은가? 땅에 주저앉아 내 것이라고 소리치기보다 필요할 때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오늘은 내가 주인이오.’ 하는 게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인 것을..

고풍스러운 내부모습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내려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