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원정대,

유라시아 횡단
그 장대한 이야기

10. 페르시아

10. 페르시아 변화의 땅, 후라산

하이라이트

시아를 낳은 땅, 후라산

셀축을 낳은 땅, 후라산

티무르를 구해준 후라산

후라산이 키워낸 진정한 진주, 파르티아

하이라이트

시아를 낳은 땅, 후라산

셀축을 낳은 땅, 후라산

티무르를 구해준 후라산

후라산이 키워낸 진정한 진주, 파르티아

☞ 시아를 낳은 땅, 후라산

마호메트는 부족을 통일하고 영토를 확장했지만 추종자들이 알라의 뜻을 품었는지 탐욕을 품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마호메트는 유력한 부족과 혼인으로 혈맹관계를 맺으며 공동체를 단합해 갔다. 그의 부인중에는 자신의 후계자가 된 우마르의 딸 아이샤와도 있었다. 아이샤와는 결혼 당시 나이가 9살이었고 마호메트는 53세였다. 4명의 여자까지만 아내로 거둘 수 있다고 코란은 가리키고 있지만 마호메트는 예외였고 기록에 의하면 13명까지 아내를 두었다고 한다. 어린 아이샤와의 결혼도, 13명이나 되는 부인도 모두 코란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마호메트가 코란을 어겨가면서 절실하게 피하고자 한 건 무엇일까? 아마 분열이었을 것이다. 아직 이슬람이 공고히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분열은 사막을 떠도는 부족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분열을 극도로 조심한 지도자들은 후계자 정할 때도 타협과 타협을 거듭했다. 마호메트의 유일한 혈육인 파티마의 남편이자 마호메트와 운명을 같이한 알리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서도 유력한 부족에게 순번을 넘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4대째가 되어서야 칼리프에 오를 수 있었다.
마호메트는 마이너 부족 출신이었고 알리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의 지지를 받아 알리가 칼리프에 승계했지만 유력한 부족은 권력을 내어 놓지 않았다. 신흥 세력과 기존 세력의 갈등, 메이저와 마이너의 대립, 교합이 불가능한 두 세력은 결국 종교전쟁을 벌였고 신흥 세력이었던 알리가 암살되고 그의 가족들도 떼죽음을 당했다. 권력을 돌려받은 다수파는 개혁을 외면했고 익숙한 사막의 전통에 이슬람의 옷을 입혀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그렇게 갈등은 다수에 의해 봉합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알리를 추종했던 사람들은 변방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땅은 후라산이었다.
이란 동북부에서 아프가니스탄 서부, 투르크메니스탄을 포함하는 메마른 땅이다. 반면 일조량이 풍부하고 페르시아 시대부터 수리시설이 발달해서 산물이 풍부했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살기 좋은 땅이었다. 현 정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특히 아라비아인에게만 특혜를 주는 불합리한 제도에 페르시아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같은 모슬렘인데 왜 차별을 받아야 하지?”
그렇게 불평을 하면 아랍인들은 대꾸했다.
“아랍어를 해 그럼 되잖아”

코란은 아랍어로만 되어있다. 그래서 모슬렘은 누구나 아랍어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셈어인 아랍어와 아리안어인 페르시아어는 구조가 달라서 습득하기가 어려웠다. 모슬렘이지만 이 등급 모슬렘이었던 것이다. 이슬람의 폭풍이 휩쓸고 간 뒤 정신을 차린 페르시아인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가 이룩한 문명이 얼마나 세련되고 우수한데, 기껏 사막에서 뛰어다니던 놈들이 이슬람의 주인이라고?”
후라산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인 되는 세상을 원했고 압바스 왕조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슬람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속옷만 갈아입은 것이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바꿔보자고 출발한 땅이 메마르고 거친 후라산이었다.

☞ 셀축을 낳은 땅, 후라산

알타이를 떠난 투르크 부족은 킵착 초원을 떠돌았다. 당시 킵착초원은 하자르 왕국이 통제했다. 그래서 하자르 왕국에 머리를 조아렸다. 하자르 왕국이 망하고 트랜스옥시아나 북부 초원을 떠돌았다. 이 동네 강자는 사만조였다. 그래서 사만조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랬더니 이시쿨 주변에 왕국을 세운 카라한조가 달려와 사만조를 멸망시키고 셀축을 쫓아냈다. 셀축은 발붙일 데가 없었다. 주변이 다 나보다 강한 놈들이었다. 셀축은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키질쿰(붉은 사막)을 건너고 카라쿨(검은 사막)을 건너 아무도 관심 없는 땅, 후라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괴롭히는 이웃은 있었다. 왕실 노예가 세운 가즈나조였다. 하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던 셀축은 가즈나조의 공격을 막아내고 후라산을 차지했다. 후라산을 차지한 셀축은 하루가 다르게 융성해 갔으며 급기야는 바그다드로 진격해 압바스 왕조의 보호자 겸 후견인이 되었다. 한 마디로 변방에서 떠돌던 방랑 무리가 오리엔트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다. 셀축의 성공을 보고 후라산으로 몰려온 투르크인들은 오스만튀르크뿐 아니라 흑양조, 백양조, 등 오리엔트 세계에 여러 투르크 왕국을 세웠으며 중앙아시아에 이어 오리엔트에도 투르크 시대를 열었다.

후라산, 호레즘, 트랜스옥시아나

 

☞ 티무르를 구해준 후라산

티무르는 박트리아의 통치자 후사인에 쫓겨 후라산으로 도피했다. 그는 후라산에서 세력을 키웠으며 트랜스옥시아나와 박트리아(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인 후사인을 죽이고 티무르 왕조를 세웠다.
티무르는 후라산에서부터 함께한 27개의 부족과 연합체를 만들어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으며 북인도, 러시아,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의 오스만, 북아프리카까지 휘젓고 다녔다. 그의 목표는 지지자들과 경제적 이익을 나누는 것이어서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오직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이 났다. 돈을 받고 대리전쟁은 해줄망정 백성을 위한 통치와 정치는 없었다. 그래서 티무르의 무력은 위대했으나 그의 영토는 그리 크지 않았다. 반면 자신이 통치하는 트랜스옥시아나만큼은 공을 들였다. 그 덕에 트랜스옥시아나는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문화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 후라산이 키워낸 진정한 진주, 파르티아

후라산은 누군가를 선택하지 않았다. 단지 준비된 땅이었다. 후라산에서 성공한 영웅들은 운 좋게 그 땅에 왔을 뿐이었다. 후라산이 키워낸 진정한 영웅은 파르티아였다. 스키타이계 유목민인 파르티아는 로마의 확장을 막아 로마를 지중해 왕국으로 묶어 놓았다. 시이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체제를 형성한 크라수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문화를 유목문화에 교합한 헬레니즘을 낳았고 파르티아에서 꽃핀 헬레니즘은 헬레니즘의 정수라서 “유럽과 아시아의 결혼”이라고 불렸다.
4만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를 공략했다가 3만의 병력을 잃었으며 본인마저 전사했다. 파르티아 공략은 로마가 패배한 첫 전쟁이었다. 로마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한 시이저는 파르티아 정벌을 계획했고 승인을 받으러 원로원에 들어가던 중 암살당하며 좌절되었다. 결국 로마의 영광은 파르티아를 넘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반면 파르티아는 헬레니즘을 잉태했다. 파르티아가 낳은 헬레니즘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문화를 유목문화에 교합한 것으로 헬레니즘의 정수였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결혼”이라고 불렸다.
메마른 사막만이 덩그렁한 후라산, 알렉산더가 한 줌의 흙을 어머니에게 보낸 알 수 없는 땅, 후라산은 어떤 땅인가?
(알렉산더가 트랜스옥시아나를 정복한 뒤로도 산악부족 하나가 격렬하게 저항했다. 질풍노도와 같이 휩쓸고 지나가던 알렉산더가 주춤하자 어머니인 올림피아2세는 알렉산더에게 핀잔하듯 편지를 보냈다. 지를 받아 본 알렉산더는 막사 밖으로 나가 흙을 한줌 집어 자루에 넣어 돌려 보냈다. 회신대신 흙 자루를 받아든 알렉산더는 그 흙을 정원에 뿌렸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보든 꽃이 말라 죽었다. 황폐화된 화단을 본 올림피아 2세는 비로소 알게되었다. 박트리아가 어떤 땅인지.. 그래서 아프카니 사탄 사람들은 말한다.
” 너희에겐 시계가 있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 “

그들은 절대로 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