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원정대,

유라시아 횡단
그 장대한 이야기

3. 민족의 시원이자 시베리아의 자궁 바이칼 호수

3. 민족의 시원이자 시베리아의 자궁 바이칼 호수

하이라이트

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 : 심청이

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둘 : 콜차크와 체코군단

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셋 : 데카브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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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 : 심청이

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둘 : 콜차크와 체코군단

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셋 : 데카브리스트

☞ 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 – 심청이 ​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5월 초 소녀는 배에 실려 앙카라 강을 거슬러 오른다. 강은 샤먼 바위를 경계로 바이칼 호수 쪽은 살얼음이 얼어 있고 앙카라 강으로는 녹아 맑게 흐른다. 샤먼 바위에 배가 멈추고 사람들은 바이칼 하란을 외치며 제례를 올린다. 제례가 끝날 무렵 흰 소복을 입은 소녀는 찬 바람에 언 몸을 강으로 던진다. 올해도 안전과 풍요를 바라는 의식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올해라고 안전할까?

바이칼에서 시작된 인신 공양은 몽고리아 고원을 거쳐 한반도로 내려와 심청으로 태어났다. 심청은 용왕의 보살핌을 받아 생명을 건졌고 왕의 아내가 되었다. 바이칼에 몸을 던진 소녀는 어찌 되었을까? 소녀를 공양할 만큼 바이칼은 무섭게 돌풍이 불어온다. 보통의 호수와 다른 것이다.

바이칼은 약 2,500만 년 전 지각의 균열에 의해 생성되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은 호수에 꼽힌다. 보통의 호수는 퇴적물이 쌓이기 때문에 약 1만 년을 주기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생명주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바이칼에서는 이런 도식이 무색하다. 2,500만 년이 지났음에도 건재할 뿐 아니라 아직도 성장하는 젊은 호수에 꼽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매년 약 2cm씩 호수가 넓어지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바다가 생성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이칼의 수명은 어디까지일까?

독특한 호수를 걷는 일은 재미가 쏠쏠하다. 이르쿠츠크에 비해 여름에는 5도가 낮고 겨울엔 5도가 높다. 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르쿠츠크가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이리도 온도차가 크게 날 수 있을까? 호수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지만, 바이칼은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하다. 그래서 바이칼을 걷는 일 마저도 특별해진다.

Great Baikal Trail은 바이칼과 자기 하나 나 둘하며 소곳소곳 걷는 트레킹이다. 숲 길이 지루할 만하면 호수가 나오고 호숫가의 비탈길이 불편할 만하면 탁 트인 초원이 펼쳐진다. 호숫가로 내려와 자갈을 사각사각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이칼 중간에 자리 잡은 키틸랴나 마을은 호젓하게 낙조를 만끽하기 일품이다. 가만히 앉아 비틀어지는 해를 보고 있노라면 바이칼이 참 신비롭고 애절하다. 바이칼의 소녀는 꽃이 되었을까? 임금님의 부인이 되지는 못했어도 꽃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Great Baikal Trail

☞ 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둘 – 콜차크와 체코군단

2일간의 그레이트 바이칼 트레일이 끝나는 마을은 “독전”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찍은 마을이 아닌가 싶을 만치 비슷하다. 이 마을은 오래전 역사의 흔적도 묻어 있다.

제독의 연인”이라는 영화는 실존 인물인 콜차크 제독과 안나라는 여성과의 짙은 사랑을 주제로 영화를 이끌어 간다. 콜차크 제독의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장에서 부하들은 연회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여성이면 키스하라는 제안을 하고, 제독은 대수롭지 않게 제안을 받아들인다.

영화 제독의연인 포스터

 잠시 후에 부관 티미레프의 아내인 안나가 들어오고 둘은 쑥스럽게 키스를 한다. 그렇게 시작된 운명적인 사랑, 혁명도 전쟁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바이칼에서 둘의 사랑은 운명처럼 사라졌다.콜차크 제독은 마지막 짜르인 니콜라이 2세의 명을 받아 백군을 이끌고 볼셰비키 적군에 맞섰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황실의 모든 금을 그에게 보내며 황실의 재건을 부탁했고 콜차크는 옴스크에서 25만 대군을 조직했다. 하지만 백군은 적군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콜차크는 근거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 전쟁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때 비슷한 이유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세력이 있었다. 6만의 체코 군단이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지배받던 체코 지역에서 징발된 군인이었다. 1차 대전은 영국∙프랑스∙러시아가 한 팀이 된 협상국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한 팀이 된 동맹국과의 유럽 대륙 국지전이었고 체코의 젊은이는 동맹국에 징집되어 러시아 전선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체코 젊은이들은 전선을 이탈하여 러시아군에 항복하였으며 러시아는 이들을 재편성해 체코군단을 만들어 독일과의 전선에 배치했다. 그때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정부가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하자 체코군단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러시아에 남을 수도 없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군에 배속되어 있었지만, 혁명기에 러시아 임시정부에도 볼셰비키 혁명세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서부전선으로 가기 위해 체코군단이 탔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출처 : 거꾸로 읽는 러시아 혁명-

그들의 목표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독일 전선에 재배치되는 것이었고, 서부전선이 독일에 막힌 상태여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도착하는 방안을 택했다. 그런 이유로 체코군단 역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고 있었다. 체코군단이 이르쿠츠크에 다다랐을 때 볼셰비키가 먼저 이르쿠츠크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체코군단은 동행한 콜차크를 넘기는 조건으로 안전 통과를 볼셰비키와 교섭했고 콜차크 제독은 볼셰비키에 넘겨져 이르쿠츠크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콜차크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른 안나는 어찌 되었을까? 그녀는 볼셰비키에 체포되어 긴 수감생활을 했으며 영화 “제독의 연인”에서는 50년 전을 회상하는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한다.

콜차크가 죽고 백군은 카펠 중장이 이끌었다. 그는 이르쿠츠크를 피해 지금 내가 서 있는 바이칼의 작은 마을에 도달했다. 뒤에는 볼셰비키 군이 추격하고 앞에는 바이칼… 카펠에게는 바이칼을 건너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나마 겨울 바이칼은 3m 두께로 얼어 있으며 버스가 운행할 정도이니 도강에는 문제가 없다는 게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사히 바이칼을 건널 수 없었다. 바이칼의 매서운 바람과 추위가 이들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3만의 백군은 바이칼에서 얼어 죽었고 봄이 되고 바이칼이 녹으면서 호수 깊숙이 수장되었다. 니콜라이 2세가 보내준 500톤의 금도 이들과 함께 바이칼 깊숙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게 진실일까? 3만의 백군은 아무런 저항이 없었음에도 바이칼을 못 건넌 것인가? 혹시 누군가의 방해로 바이칼을 건널 수 없었던 건 아닐까? 500톤의 금괴는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 가져간 건 아닐까? 70년이 지나 금을 찾는 탐사가 바이칼 곳곳에서 진행되었지만, 금속탐지기로도 금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다. 기차 5량의 금괴가 금속탐지기에 잡히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게 아닌가?

체코군단은 무사히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미국과 영국이 제공한 배를 타고 유럽에 도착했다. 그들이 유럽에 도착했을 때, 1차 대전은 이미 끝이 났고 그들의 조국 체코는 독립을 얻은 뒤였다. 체코군단은 영광스러운 환영을 받으며 귀국 퍼레이드를 가졌다. 그들의 귀향 행렬은 전리품을 가득 싣고 행군하는 로마 군단과 같았다. 빈손으로 떠난 체코의 젊은이들은 어떤 선물이라도 가져온 것인가? 로마 시민이 열광하는 이유는 전리품 때문이다. 로마는 약탈 경제였고 로마의 영광은 전리품에 있었다. 그래서 군단의 귀향은 로마의 풍요였고 로마 시민은 선물 보따리를 가져오는 군단의 퍼레이드에 환호했다. 체코군단의 모습이 로마군단의 귀향 퍼레이드 같았다면 그들의 귀향이 남달랐을 수도 있다. 모든 건 추측이지만 바이칼에서 사라진 금을 체코군단이 가져갔다면 어떤 일이 가능할까? 체코군단은 빈손으로 출발했으며 헐벗고 굶주린 체 전선을 전전했다. 그럼에도 체코 최초의 은행인 체코군단 은행을 설립했다. 체코군단의 귀향 퍼레이드는 로마군단의 귀향 퍼레이드였던 것이다.

[당시의 체코 슬로바키아 군대 모습]
출처 : 오피니언 뉴스

☞ 바이칼이 들려주는 이야기 셋 – 데카브리스트

1812년 9월,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지만, 군영엔 발진티푸스가 창궐했고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는 겨우 8만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신속히 점령하면 러시아가 항복하리라 생각했지만, 러시아의 반격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나폴레옹을 추격하여 파리에 입성하였고 전쟁에 참여했던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개방된 문화와 자유로운 공기에 흠뻑 빠져서 돌아왔다.

[데카브리스트의 혁명(vasily timm)
출처 : 다음 블로그, 존재의 따뜻함]

그리고 유럽에 비해 낙후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젊은 청년 장교들은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으며 전제정치와 농노제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거사를 계획한다. 하지만 거사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혁명군 3천 명이 모두 체포되었다. 혁명에 참여한 600명의 장교 중 121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재판 결과 주동자 다섯 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36명은 징역형에 처해졌으며 나머지는 시베리아 유배형이 내려졌다. 이들이 혁명을 꾀한 게 2월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데카브리스트(2월)라고 불렀다.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한 남편을 따라가려는 귀족 부인들에게 짜르는 선택하라고 했다.

“반역자인 남편을 버리고 재가를 하면 귀족의 신분을 유지시켜주겠다. 아니면 남편을 따라 유형지에 함께 가도 좋다. 그 경우 귀족의 신분과 특권은 박탈된다.”

젊은 부인 열한 명은 40일간 밤낮없이 썰매를 달려 남편을 찾아갔다. 1827년 2월 8일, 처음 도착한 트루베츠카야는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에 입을 맞추고 난 후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나는 희망의 나라에 왔어요.”

콜차크보다 더 찐한 사랑을 보여준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은 형기를 마친 남편과 모스크바로 돌아오지 않고 이르쿠츠크에 정착했다. 암울한 제정 말기 모스크바에는 희망이 없지만, 이르쿠츠크에는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해 이르쿠츠크는 모피 교역을 위한 군사 요새에서 시베리아의 파리로 다시 태어났다. 파리를 꿈꾼 발콘스키는 형기를 마치고 이르쿠츠크에 집을 지었고 그의 집은 인텔리들이 모여 토론과 시 낭송, 음악회를 갖던 사교장이 되었다. 이르쿠츠크에 문화의 싹을 심은 그의 집은 현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는 습관이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습관은 고급스러운 문화를 낳고 경박하고 잔인한 습관은 그런 문화로 자리 잡는다. 이르쿠츠크는 코사크가 세웠지만 데카브리스트가 재건하며 비로소 새롭게 탄생했다. 비로소 야만스런 이르쿠츠크가 우아한 문화의 옷을 걸친 것이다. 시베리아의 파리로…

시베리아로 남편을 찾아온 11명의 천사
(출처:워먼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