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원정대,

유라시아 횡단
그 장대한 이야기

6. 타림분지와 타클라마칸

① 천산 대협곡

6. 타림분지와 타클라마칸
① 천산 대협곡

하이라이트

천산의 동막골을 찾아가는 길

중국불교의 교조, 쿠마라집

하이라이트

천산의 동막골을 찾아가는 길

중국불교의 교조, 쿠마라집

☞ 천산의 동막골을 찾아가는 길

천산은 알타이와 함께 고생대의 일어난 바리스탄 조산운동(Variscan orogeny)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7,0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떨어져 나온 인도판은 매년 20cm를 이동하여 5천만 년 전에 유라시아 대륙에 도착했으며 그 뒤로도 유라시아 대륙을 힘차게 밀고 있다. 인도판은 북동쪽으로 매년 67mm 이동하는 반면 유라시아 판은 북쪽으로 20mm밖에 움직이지 않는다. 두 판의 이동속도 차이로 유라시아 대륙은 계속 찌그러지고 인도 대륙은 1년에 4mm씩 압축되고 있으며 티베트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히말라야 역시 매년 5mm씩 높이를 경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인도와 히말라야, 티베트고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도판이 티베트를 들어 올리며 유라시아를 파고들어간 뒤 북 중국판을 미는 현상이 계속되며 잠자던 천산이 다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천산은 오랜 시간 휴면 상태였지만 2,500만 년 전부터 다시 조산운동을 시작했으며 인도판이 멈추지 않는 한 얼마나 하늘 높이 솟구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열쇠는 인도판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천산은 단일 산맥이 아니라 3열의 산맥이 수평을 유지하며 서에서 동으로 2,900km 뻗어 있다. 그래서 북에서부터 북 천산, 중앙 천산, 남 천산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북 천산과 중앙 천산은 이식쿨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중앙천산과 남 천산 사이엔 회랑같이 긴 알파인(Alpine) 초지가 펼쳐진다. 남천산은 중앙아시아와 타림 분지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중국으로 뻗어 들어가서는 중국 천산을 이룬다. 
남 천산은 정겨운 산맥이다. 타클라마칸을 건너려는 상단이나 수도자는 남천산에 의지해 긴 여정을 시작하기 때문에 모험과 사랑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또 남 천산은 타림분지와 중앙아시아를 적시는 시르다리아, 이리 강, 타림 강, 쿠차 강의 시원이다.

3열의 천산산맥과 산맥에 감추어진 바얀울루

이리계곡에서 중국 천산을 넘어 타클라마칸을 찾아가는 2일간의 탐험 여행은 천산의 숨겨진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특히 천산의 지맥 사이에 콕 들어앉은 바얀울루[巴音布鲁克]는 방문 3개월 전 허가를 신청해야만 탐방할 수 있는 유목민 보호구다. 바얀울루에선 새로운 천산을 만나게 된다.
천산의 중첩된 산맥 사이에 비현실적인 형상의 산악 습지와 애인의 눈물이라는 별칭을 가진 백조 호수가 천산의 웅위(雄爲)롭고 광활한 맛과 멋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만나는 천산은 타클라마칸을 지키고 선 천산이 아니고 스텝 지대를 감싸고 앉은 천산도 아니다.
천산은 메마른 사막을 만들었으며 습윤한 초지 역시 만들었다. 그리고 둘의 경계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천산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둘을 하나가 되는 방안을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바얀울루에서 만나는 천산은 그런 결과인 듯 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대지를 만든 천산이 둘의 장점만을 모아 첩첩산중에 숨겨 둔 천산의 연인이었다.

백조의 호수 (출처 – CRI ONLINE)

☞ 중국불교의 교조, 쿠마라지바

하나의 산맥을 넘어 바얀울루에 들어왔듯이 산맥을 하나 더 넘으면 천산을 벗어나게 된다. 산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펼쳐진 환경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타클라마칸의 메마르고 건조한 대기가 불어오고 초록의 대지는 붉은 진흙 산으로 바뀐다. 이 계곡에서 대승불교가 재 정립되었으며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쿠차는 천산남로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다. 하지만 다른 오아시스와 달리 천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호수를 이룰 만큼 물이 풍부하고 실크로드의 길목을 차지하고 있어서 서역에서 가장 먼저 왕국이 세워졌으며 오아시스 36국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가장 부유했다. 쿠차가 얼마나 부유했는지는 키질석굴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키질석굴 벽화 (출처 – 데일리안)

키질석굴의 벽화는 인물상에 푸른 색의 안료를 사용하여 매우 뚜렷하고, 강한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 문제는 푸른색의 안료이다. 인물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푸른색 안료는 청금석(靑金石)으로 키질석굴 이전에는 어느 벽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황금의 2~3배에 거래되는 귀한 금속이기 때문에 감히 벽화에 쓸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청금석은 영원히 색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투탕카멘스의 황금 마스크에도 치장석으로 사용되었고 고대왕국 에서는 황제의 치장석으로 사용되는 보석 중 하나였다. 그런 보석을 갈아 벽화에 사용했으니 쿠차가 얼마나 부유했던 것인가? 부유해질수록 가진 것을 지키고 싶었던 상인들은 석굴 제작에 돈을 아낌없이 지원했고 키질 석굴은 발견된 것만 236개에 달한다. 쿠차에서 불교가 흥성했던 것은 쿠샨왕조의 기여가 매우 컸다. 흉에 의해 기련 산맥에서 쫓겨난 월지는 이리계곡을 지나 이식쿨에 정착했으나 뒤따라온 오손에 떠 밀려 트랜스옥시아나(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다.

대월지를 구성하는 5개 부족이 지역을 분할하여 지배했으나 그중 쿠샨족이 다른 부족을 통합한 뒤 북인도(파키스탄)와 박트리아(아프카니스탄), 트랜스옥시아나, 중국 신강에 걸쳐 쿠샨 왕국을 건설했으며 인도와 중앙아시아, 중국을 문화적으로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파급한 문화적 소산이 바로 불교였다.

키질석굴과 쿠마라지바
(출처 – 한국일보)

불교는 쿠차에서 현지화 과정을 겪었는데, 그 중심에 쿠마라지바(鸠摩罗什)가 있었다. 쿠마라지바는 인도에서 수행한 후 쿠차로 돌아와 역경사업과 불교 전파에 노력하여 대승불교의 주요 철학적 사상을 정립하였다. 쿠마라지바가 활동하던 때는 5호 16국 시대로 난립한 왕국들은 정치적 안정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모색을 하였으며 백성을 구한다는 대승불교의 가치 추구와 왕조를 중심으로 공동체 완성이라는 방향성이 일치하여 왕실의 후원하에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쿠마라지바가 중국불교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으면 2,000년 중국불교는 두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3개의 시기가 나눈다고 한다. 시대를 구분하는 두 인물은 ‘쿠마라지바’와 ‘현장법사’이다. 쿠마라지바의 이전과 이후, 현장법사의 이전과 이후가 달랐을 만큼 쿠마라지바의 역경사업은 중국불교의 큰 토대가 되었다. 그가 태어나고 대승불교를 완성한 곳이 쿠차이며 중국 불교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듯이 쿠차에서도 불교가 소멸했다. 인도에서 불교는 힌두교와 차별성을 유지하지 못해서 결국 힌두교에 흡수되었다. 쿠차에서 불교는 이슬람의 광풍 앞에 무기력했다. 거창했던 번영의 뒤안길을 되새기며 쿠차의 불교유적지를 돌아보고 천산이 사막이 되어가는 또 다른 얼굴이자 변화의 단면인 대협곡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