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원정대,

유라시아 횡단
그 장대한 이야기

7. 파밀과 유라시아 대산맥

③ 낭가파르밧

7. 파밀과 유라시아 대산맥
③ 낭가파르밧

하이라이트

Killer Mountain이라고 불리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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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er Mountain이라고 불리는 산

☞ Killer Mountain이라고 불리는 산

독일인의 자존심은 언뜻 보면 교만해 보인다.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교만해지기까지 그들이 감내한 희생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로마군단을 몰아낸 게르만 전쟁, 나폴레옹을 굴복시킨 전쟁, 종교개혁을 마무리한 유럽 종교전쟁, 근대에 있었던 1,2차 대전까지… 모두 독일인이 주인공이었다.
히말라야에 그런 산이 하나 있다. Killer Mountain으로 알려진 낭가파르밧이다.

훼어리 메도우에서 본 낭가파르밧

1934년 2차 독일 낭가파르밧 원정대는 정상을 200m 남겨두고 마지막 캠프를 쳤다. 날씨도 좋았고 내일이면 정상에 오르리라는 생각에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하지만 낭가파르밧의 신은 이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서 날씨는 급변했고 세찬 눈 폭풍이 들이닥쳤다. 눈 폭풍은 이틀간 이어졌으며 삼 일째 되는 날 독일팀은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을 서둘렀다. 하지만 10명은 산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베이스 캠프 가는 길

1937년 독일은 낭가파르밧 원정대를 다시 꾸렸다. 좋은 날씨에 캠프 설치가 순조롭게 진척되어서 정상 등정을 낙관하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 날밤 라키오트 피크에서 떨어져 나간 빙하가 대형 눈사태를 일으키며 캠프 4를 휩쓸고 지나갔다. 고요한 아침 캠프 4엔 아무도 없었다. 16명 전원이 하루 밤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이는 히말라야 역사상 가장 큰 사고였다. 이때부터 낭가파르밧은 사람을 잡아먹는 산, Killer Mountain으로 불리게 되었다.
히틀러는 게르만의 우수성을 알리고 영광을 선전하기 위해 낭가파르밧 등반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하지만 히틀러 시대 독일은 낭가파르밧에 오를 수 없었다. 낭가파르밧은 1953년이 되어서야 독일 등반대에게 정상을 허락했다. 당시 29세인 헤르만 불은 마지막 캠프를 떠나 무사히 정상에 올랐으나 캠프로 돌아오기 전 어두워졌다. 그는 하산을 중단하고 경사진 얼음 사면에 쪼그리고 앉아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추위와 졸음, 어둠의 공포를 이겨낸 체 긴 밤을 홀로 지새웠으며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지 41시간 만에 살아 돌아왔다. 얼마나 긴 밤을 보냈으면 20대 청년이 60대 노인이 되어서 돌아왔다고 등반기를 기록하고 있다. 게르만에게 좌절은 있어도 포기란 없는 것인지 독일은 낭가파르밧을 포기하지 않았고 낭가파르밧에 첫 발을 디디며 게르만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낭가파르밧 절벽을 오르는 짚차 길

라인홀트 매스너의 낭가파르밧 등반은 death zone(한국어 번역판-죽음의 지대)이라는 등반기와 영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 으로 잘 소개되었다. 죽어가는 동생을 놓고 온 매스너는 이 책에서 죽음의 지대에서 겪는 특별한 경험들을 나열하며 자신의 행위에 작은 면죄부를 주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등반의 의미를 이렇게 미화한다.

“나는 산을 정복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새롭게 이 세계를 알고 느끼고 싶다.” 낭가파르밧을 전면으로 바라보면 걷는 3일간의 트레킹, 독일 원정대는 낭가파르밧과 마주하는 언덕배기를 요정의 잔디밭(Fairy Meadow)이라고 이름 붙였다. 낭가파르밧과 밤새 담소하기에 최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바라보아도 좋고 걸어도 좋은 산, 오르지만 않는다면 낭가파르밧은 오롯이 그 자리에서 나를 반긴다.

해질녁의 낭가파르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