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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인도의 마지막글 “50세를 넘긴 인간은 無變의 感性을 가진 魔慾의 性體다”

 

형식적 관계를 즐기고, 그 안에 평안하면서도 끝으로 가는 절박에 쫓겨 가두어진 본능의 탈을 썼다 벗었다 합니다. 무력감은 인간의 본능이 아닙니다. 씌워진 足鎖입니다.
야성은 남을 불편하게 하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야성을 주고 얻은 안정은 무력감을 가져왔고, 야성을 되찾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야성을 찾고 싶은 50살의 청년은 짐을 꾸렸습니다. 라닥을 머나먼 미래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쓰인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유를 물어볼 필요 없이 그냥 받아들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보는 현자의 말이 아닐까요? 현자의 말대로라면 난 어디쯤 있는 것일까요?
실질적으로도 나치는 집시와 유태인을 동일하게 봤고, 2차 대전 중 가장 많이 죽은 사람도 순위로 보면 러시아 농민 – 집시 그리고 유태인입니다. 이런 역사적 근거는 여럿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알함브라 칙령으로 쫓겨났을 때도 유태인과 집시는 같은 운명, 같은 대상이었습니다.
라닥에 오기 전 델리에서 하루를 묵었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델리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라닥, 캐시미르 여행을 마무리하며 무엇을 얻었는지 공항에 쭈그리고 앉아 넷북을 펼칩니다. 물을 사러 가면서 본 석공의 손길이 기억납니다. 돌같이 굳어버린 손가락 끝으로 물을 부어가며 돌을 갈고 있는 석공은 피폐하고 낡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갈고 있는 석물은 포동포동하며 화려한 미색이 꿈틀대는 쉬바였습니다. 석공의 손을 거쳤을 쉬바는 탐스럽습니다. 여자라 해도 손색이 없고, 남자라 해도 아름다움이 줄지 않습니다. 왜 쉬바는 자신의 사람을 이리 고생시킬까? 석공은 왜 무덤덤하기만 할까요? 석공의 분노는 어디로 갔을까요? 석공은 분노를 모르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그의 분노를 제가 볼 수 없는 것일까요? 그는 다시 다른 석물을 손끝으로 닦기 시작했습니다.
석공의 손끝에서 놀아나는 석물은 쉬바를 상징하는 요니와 링가입니다. 요니는 소음순을 상상케 하는 길고 좁은 길목과 대음순을 상상케 하는 넓고 둥근 본체로 되어있습니다.
소음순 부분엔 코브라가 꼬리를 길게 뻗고 누워있습니다. 그냥 누워있는 게 아니라 깃을 활짝 펴 유혹하는 기세가 등등합니다. 요니 한가운데 링가가 꽂혀 있습니다. 쉬바의 성기로 표현되는 링가 귀두에는 정자를 조각해 두었습니다. 휘두르는 꼬리가 링가의 중단까지 길게 내려와 있습니다. 코브라를 맹독의 敵物로 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날카로운 이빨에 화려하게 날름거리는 혀, 날갯짓하는 몸통, 그리고 허공을 가르며 넘실대는 춤사위, 누구인들 코브라의 유혹을 마다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숨겨진 독주머니를 갖고 있고 사랑한 자를 후회하게 만드는 반전의 힘도 갖고 있습니다. 코브라의 유혹에 홀려 자신의 링거를 요니에 꽂아 넣습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본능의 힘에 굴복하겠지만 그 대가로 생명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요니에 꽂히지 않은 링거는 안전하겠지만 다음을 이을 후세가 없으니 무엇이 불행이고 행운이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코브라의 초대는 거부할 수 없는 링거의 운명이 아닐까요?
짧은 18일간의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제가 그런거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와야겠습니다. 초대를 받았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