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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거인의 정원을 걷다.


거인은 외로움을 달래려고 시장을 찾았지만, 사람들은 그의 큰 몸을 보고는 놀라 모두 거인을 피했다.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 거인은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정원을 망칠 거 같이 이리저리 뛰노는 아이들.. 거인은 아이들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교차했다. 정원이 망가지면 어쩌지?

“저리 가서 놀아, 이놈들아!”
거인은 애들을 정원 밖으로 쫓아내고는 아이들이 다시는 정원에 들어오지 못하게 높은 담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결 고요해진 정원을 바라보면 거인은 손을 털었다.
“이제 정원은 안전해..”
하지만 정원도 거인도 담장 안에서는 안전하지 않았다. 그건 담장으로는 막을 수도, 가둘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거인의 정원’에서 거인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이렇게 쓰고 있다.

아이들을 내쫓고 담까지 높이 쌓아 올리니 한결 고요해진 정원, 하지만 그때부터 거인의 정원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아이들이 찾아오기 전까지…

거인은 햇살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의아했을 테고 언제나 햇살이 돌아오려나 하염없이 담장 너머를 바라봤다. 하지만 정원엔 시린 겨울이 떠나지 않았고 거인의 기다림은 끝이 없었다.

봄은 담장의 허물어진 틈을 비집고 아이들이 정원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야 돌아왔다. 정원에 비로소 볕이 들었을 때 거인은 나무에 오르려는 아이를 보았고 거인은 그 아이를 번쩍 안아 나무에 올려주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장면에서 거인은 비로소 깨달았다고 쓰고 있다. 거인은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CLIFF OF MOHER 2
모허 절벽 가는 길
CLIFF OF MOHER 1
모허절벽

200m의 거대 절벽이 해안선과 만나 마치 거인의 담장같이 대지를 가두어 둔 모허 절벽(Cliffs of Moher)을 걷는다.
오스카 와일드는 여기서 거인의 정원을 창안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북대서양의 물기 가득한 대기와 걸프 만(페르시아 만)에서 흘러드는 따뜻한 해류가 만나 해안은 늘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안개가 한 꺼풀 두 꺼풀 덮고 있어서 거인의 마음같이 아리송하기만 하다. 안개만이 아니다. 바람은 또 얼마나 거센가. 바람을 막고 선 둔 턱엔 잔디가 덮여 있는데, 잔디는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머리를 제대로 들지도 못한 채 땅에 처박고 있다. 걷는 동안 나도 몇 번을 휘청거렸다. 다행인 건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만 불어 위험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바람을 등에 지고 걷는 일은 행복한 걷기다. 한 발을 들어 올리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아도 바람이 옮겨다 준다. 땀이 날 일도 없다. 바람이 알아서 다 가져가 버린다. 꼭꼭 여민 방풍복 안에서 나는 그저 바람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행복한 걷기인가…

절벽 길을 따라 8km를 걸으면 모허 해안절벽 트레킹은 끝이 난다. 참 아쉽다. 8km만 더 걸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람은 평균치를 구하려는 자연의 힘찬 역동이다.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불러오고 대지는 항상 바다보다 온도가 높으니 바닷가 절벽엔 바람 잘 날이 없다. 그 바람과 파도의 두드림을 묵묵히 받아주고 선 모허 절벽.. 오스카 와일드는 모허 해안절벽을 보고 거인의 정원을 상상했다. 높고 단단할수록 외로워지는 거인의 외로움처럼 해안절벽은 여전히 단단하기만 하다. 하지만 언젠간 거인의 정원에 볕을 가져온 아이들처럼 절벽에는 바람과 파도가 멈추질 않는다. 절벽아, 닳아 쓰러지라고 외치며..

골웨이(Galway)에는 모허 절벽만큼이나 애절한 사연이 있다. 맨체스터에서 면화 무역을 하는 집안에 태어난 아이는 커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건 맨체스터의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도시고 면방직은 산업혁명의 도화선이었으니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백만장자가 될 운명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헨리 미첼, 그는 부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고향인 아일랜드를 찾았고 킬레모어(Kylemore)의 아름다운 자연에 푹 빠졌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아내 마가렛에게 잊지 못할 생일선물로 성을 지어 주었다. 호수가 앞에 펼쳐지고 뒤로는 가파른 산이 담장같이 대지를 품은 천혜의 배산임수 명당이다. 하지만 명당은 후대를 위한 것이었고 마가렛에게는 명당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을 선물 받고 6년 만에 이집트 여행 중 얻은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로맨티시스트 헨리는 아내를 잊지 못해 성 가까운 곳에 고딕 양식의 교회를 지어 그녀의 영생을 기원했으며 가족 묘당을 지어 그녀와 함께 합장을 시간을 기다렸다. 묘당에 가서 보니 마가렛은 45세에 죽었고 헨리는 85세에 생을 마쳤다. 묘당은 둘의 안식이 방해받지 않도록 입구를 벽돌로 봉인되어 있다. 그런데 둘은 한날한시에 죽은 것이 아니라 무려 40년이나 지나서야 헨리가 사망했으니 무덤을 열어놓고 자신이 들어갈 날을 기다린 헨리의 지극정성과 사랑이 돋보이기만 하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신을 위한 신전 무덤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며 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런데 헨리는 아내의 무덤을 지어 놓고 40년을 기다린 뒤에야 아내와 영면했으니 파라오가 부럽지 않은 남자가 아닌가?

KYLEMORE ABBEY
킬레모어 수도원의 전경
헨리 미첼과 마가렛의 묘당
▲봉인되어있는 묘당 앞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MARCARET BELOVED WIFE OF MITCHELL HENRY OF KYLEMORE CASTLE
 (킬레모어 성의 미첼 헨리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마가렛 1874년 12월 4일 카이로에서, 45세) DIED AT CAIRO DEC. 4. 1874 ACED 45.
 MITCHELL HENRY (미첼 헨리 1910년 11월 22일, 85세) DIED NOV. 22. 1910 ACED 85.

골웨이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코네마라 국립공원(Connemara National Park)이다.
이 지역은 토탄(이탄 泥炭)의 대지로 불린다는 말에 귀가 쫑긋했다. 토탄이 무엇인가? 페름기(고생대의 마지막 여섯 번째 시기로 약 2억 9,000만 년 전부터 2억 4,500만 년 전까지)에 울창했던 산림은 모두 석탄과 석유가 되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토탄은 석탄이 되지 못한 아류라고 한다. 소택지나 늪지 등 물이 많은 지역에 퇴적된 수목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지 못하고 그대로 퇴적되기 때문에 석탄이 되지 못하고 토탄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코네마라 국립공원 입구에는 토탄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박물관이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토탄을 캐서 연료로 썼고 아일랜드 위스키(Irish Whisky)는 토탄 대지에 정제된 갈색의 물을 사용할 뿐 아니라 증류 시에도 화력이 약한 토탄을 사용해서 토탄의 향이 밴 독특한 위스키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아일랜드에는 토탄의 비극도 있다.

토탄 대지는 표피층이 얇고 척박하기에 감자밖에 농사지을 마땅한 작물이 없어서 감자만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1845년부터 1850년까지 아일랜드를 휩쓴 감자 마름 병은 토탄 대지의 모든 감자를 말려 죽였고 결국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200만 명이 굶어 죽고 150만 명이 아일랜드를 떠났으니 당시의 굶주림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토탄 대지
토탄이 되어가는 과정

방문자 센터를 나와 토탄의 대지를 걸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토탄을 찾을 수는 없었다. 토탄 대지는 한 뼘 가까운 흙이 표층을 이루고 있어서 땅을 절개하거나 표층을 거두어 내기 전엔 토탄층을 볼 수 없었다.

토탄에 덮인 대지는 나무 하나 없는 황무지고 두루뭉술한 구릉이다. 아일랜드에선 이런 땅을 BOG LAND(늪지)라고 부른다. 물 한방을 없는 구릉을 늪지라고 부르니 우스운 일이지만 토탄 대지가 형성되었을 수십만 년 전엔 꽤나 넓은 늪지였으니 그리 무관한 표현만은 아닌 듯하다. 내용이야 어떻듯 광활한 구릉을 걷는 일은 즐거운 산보다. 수십만 년 전엔 저지대 늪지였다지만 지금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구릉이니 걷는 내내 가슴이 후련하다.

자연을 벗 삼아 걷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깊은 수림을 걸으면서 느끼는 편안함, 절애의 절벽을 걸으면서 느끼는 짜릿함. 나는 그런 길을 지난 사흘간 걸었다. 그런데 오늘은 맛이 자못 색다르다. 무한의 광야를 걷기 때문이다. 지구는 이렇듯 다양하고 그 땅을 걷는 나의 감정 또한 다양하니 걷는 즐거움을 오늘도 멈출 수가 없다. 내일은 어떤 대지와 사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아일랜드는 내일이 기다려지는 대지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