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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코폴리아 트레일

 

비가 내리는 아침, 새벽부터 굵은 비가 내립니다. 세이셸의 우기는 12월부터 1월까지이고 2월부터 날이 좋아진다는 데, 12월을 코앞에 둔 시기라서 그런가 봅니다. 어제 픽업했던 기사는 11월 은 비가 새벽에만 오고 아침이 되면 멎는다는데, 정말 출발이 임박해서 비가 멎습니다. 세이셸은 아직 기후변화의 영향을 덜 받나요. 기후의 순환 규칙이 지켜지니 말입니다.
뉴스는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로 시끌벅적합니다. 아름다운 파리를 파괴하는데 테러만큼 효과적인 게 있을까요. 피 흘리며 만들어낸 파리의 정신과 문화는 테러 앞에 무너지는 건가요, 사고는 다른 나라들이 치고 피해는 파리가 당하니 파리가 억울해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럽의 이슬람에 대한 증오는 커질 테고, 가장 이슬람 인구가 많은 프랑스는 어떤 정책을 취하게 될까요, 이슬람을 소외시키면 테러는 반복될 텐데, 그러면 IS의 희망 대로 되는 게 아닌지요, 유럽에서 쫓겨나 중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복잡합니다. 괜히 후세인을 건드려 더 큰 문제를 만든 부시가 야속합니다. 그냥 놔두면 그 안에서 통제될 일을 십자군이랍시고 이라크에 들어갔지만 해결된 게 하나 없이 복잡하게만 만들어 놓았으니… 뒤숭숭한 테러 이야기를 하며 코폴리아 트레일(Copolia) 시작점으로 차를 몰아갑니다.
산악 가이드로 나온 테렌스 벨레(Terence Belle)는 파리 테러 이야기가 나오자 세이셸은 테러도 없고, 공해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 파라다이스라고 치켜세웁니다. 입구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그의 뒤를 따라 고요한 숲에서 그가 가리키는 식물과 생명체에 눈을 맞추는 가벼운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원시 상태의 자연이 잘 보존된 코폴리아 트레일. 나무의 뿌리가 엉켜서 계단 역할을 해준다. 역시 마헤섬의 하이라이트는 코폴리아 트레일인 듯]

처음 가리킨 건 나무줄기에 붙어 생기발랄한 푸른 잎사귀인데, 그는 ‘Leaf palm’이라고 합니다. 팜이면 야자수인데 잎이 붙어 있는 나무냐고 물으니 나무가 아니라 잎이라고 하네요. 그러면서 세이셸에는 6종류의 팜이 있는데 그중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분류했을까요. 그래도 유능한 가이드라고 하니 믿기는 믿는데, 풀을 보고 나무라고 하니 어찌해야 할지… 그래도 그런 게 있겠죠… 여행은 모르는 세상을 배우는 것인데 나의 지식으로 보려고만 하면 안 되는 것이죠. 남의 지혜를 빌리는 게 여행자의 덕목이니 수첩에 그대로 적어 넣습니다. 그는 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고 이것저것을 보여줍니다.
레몬글라스, 바닐라, 아로마 잎, 이것 이외에도 알지 못하는 잎을 비벼서 냄새를 맡게 하고는 무슨 향인지 알려주고 큰 나무 앞에서는 돌을 들어 나무 껍데기를 벗겨 계피라고 맡아보라고 알려주느라 몇 걸음 못 가고 멈춰 서고 다시 걷는 일이 반복됩니다. 품질 좋은 계피는 좋은 수출품이어서 이제는 이렇게 큰 나무가 정글 이외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세이셸에 대해 처음 기록을 남긴 건 아랍 상인들이었습니다. 인도양의 무역풍을 받아 인도와 동아프리카를 오가며 무역에 종사하던 그들이 세이셸을 찾아낸 것입니다. 아랍 상인들은 화산섬인 세이셸이 마치 이슬람 무덤 모양이라고 생각해서 섬을 개발하지 않고 원주민이 채취해다 주는 향료(레몬글라스, 바닐라, 시나몬, 아로마 등)를 교역하는 중간항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원래 원주민은 흑인인데 이때 아랍인들이 일부 섞였고 그 뒤로 17세기 프랑스가 탐사대를 보내 개발을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영향권에 있다가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한 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남아공에서 영국계 백인이 대거 이주해왔고 아프리카 본토처럼 프렌테이션 농업과 수산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동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뿐 아니라 인도, 중국에서도 임금 노동자가 대거 이주하여 오늘날의 세이셸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이셸 사람이 말하는 크레올 문화는 복합입니다. 흑인과 백인과 인도인과 중국인이 같이 살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새로운 인종이 탄생했고 문화를 공유하며 서로 이해하는 부정 없는 포용의 사회인 것입니다. 크레올 언어는 프랑스말에 아프리카 말과 마다가스카르 말이 혼합된 말이라고 합니다. 말, 문화, 사람이 새로이 만들어진 땅이니 파라다이스의 모습이 아닌지요… 흑인도 곱슬머리는 드물고 피부도 그리 검지 않습니다. 반면 흑인 특유의 볼륨감과 유연성은 그대로입니다.
자연도 인간을 닮아가나요. 망글로브 나무뿌리가 문어 다리같이 여러 갈래로 억세게 자란 나무를 가리키며 팜 나무라고 하네요. 와카마룬(Vakwa Maron)이라고 부르는 데, 제가 알고 있는 판마에 대한 상식이 또 깨집니다. 물에 갖다 놓으면 망그로브 나무라 해도 아무 이견이 없을 거 같은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뿌리를 자르면 안에서 속 뿌리가 자라 나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남자 성기 같아서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속뿌리를 삶아 마시면 성기를 크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속설이 있답니다. 성기가 작아 고민하던 남자는 자주 뿌리를 삶아 마셨는데, 그 바람에 성기가 너무 커져서 도리어 여자들한테 외면을 받아 불행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뿌리가 잘리고 그 안에서 다시 자란 속 뿌리를 사진에 담고 보니 정말 제거랑 너무 비슷하네요… 숲길은 다듬어져 있는 구간도 있고 자연 그대로인 구간도 있습니다. 나무뿌리가 억세게 땅을 움켜쥐고 있기도 하고 드러나 있기도 한 길은 정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길을 내기 위해 일부러 애쓰지 않아서 억센 뿌리가 땅바닥을 울퉁불퉁 마감질 하거나 이파리가 쌓여 푹신하거나, 질퍽한 흙이 생명체를 품고 흐트러지거나 하나하나가 자연 그대로여서 좋습니다.

[나무 이름을 잊었지만 뿌리가 나뭇가지같이 뻗어 몸체를 지탱한 모습이다. 뿌리를 자르면 그 안에서 속 뿌리가 나오는데, 그 모양이 남자의 심볼과 같다. 현지 사람들은 이걸 삶아 먹는다는데, 모양이 같다고 힘도 좋아지려나…]

세이셸에서는 개미를 산의 파괴자라고 말합니다.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땅을 조금씩 파고들어 가고 흩트려 놓아 흙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그리 부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소리, 냄새를 맡으며 1시간 30분을 걸어 정상에 닿았습니다. 정상은 단단한 화산인데 사람이 다니는 길은 암봉이 드러나 있고 조금만 벗어나면 두꺼운 흙이 쌓여 작은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늘에 레펜도스로 분류되는 식충식물 군락지가 펼쳐집니다. 컵 모양의 식물은 입구에 꿀을 묻혀 파리나 나비를 유혹해 안으로 끌어들이고는 입구를 막고 점액으로 녹여 잡아먹는 식충식물입니다.
보르네오 섬의 키나발루 국립공원에 세계에서 가장 큰 식충식물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렇게 많은 동종의 꽃이 군락을 이룬 건 세이셸만 할까요…

[식충식물의 모습]
[키나발루 국립공원에서 보고 몇 년 만이다. 정상을 가득 덮은 식충식물에 손가락을 넣으니 짤라 먹을 태세다.]

정상의 풍경은 대조되는 파노라마가 감미롭게 펼쳐집니다. 먼저 만나는 푸른 대지는 세이셸에서 가장 높은 셀리오스 봉(Morne Seychellois)과 두 번째로 높다는 몽블랑 봉(Morne Blanc)이 보입니다.
두 봉우리 사이의 깊고 푸른 숲을 보면 세이셸의 자연이 얼마나 잘 보존되어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반대편으로 끝도 없이 넓은 인도양이 펼쳐집니다. 좌측엔 프랑스 탐험대가 처음 발을 디딘 St Anne Island이고 그 옆엔 청정지역으로 일체의 개발이 금지되어 있어 리조트나 호텔도 없고 오직 다이빙만 가능한 섬이라고 합니다. 멀리 산에서 내려봐도 산호가 가득한 바다는 속살까지 푸르게 빛납니다. 그리고 재미난 건 두바이의 팜 메이주를 본뜬 인공섬이 연안에 세워져 있습니다. 모양도 내용도 비슷합니다.
두바이의 꿈이 여기서도 실현되었으니 아랍 돈의 힘이 대단합니다. 얼핏 책자에서 보니 새로 개발하는 리조트가 작은 게 130만 달러, 큰 게 165만 달러 정도 한다고 합니다. 저는 능력이 안 되지만 능력이 돼도 너무 한가해서 저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세상 좋은 걸 봐야죠, 파라다이스도 묶여 살면 행복할 거 같지 않아서요…
반면 바다를 내려다보는 건너편 산 정상에는 거대한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퀴즈같이 다섯 고개를 넘습니다. 정부기관, 천문 관측소, 군 시설, 대통령궁, 호텔… 다 아니고 아부다비 술탄의 별장이랍니다. 아부다비로 부족해 여기에까지 그것도 자연을 훼손해가면서 산꼭대기에 성을 하나 지어 놓았으니 돈 많다 자랑 말고 좋은 데 쓰지… 모든 호텔, 리조트도 섬의 생존에 필요한 식수와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는 규정 때문에 해안가에 세워지는 데, 아부다비 술탄만 산 위에 궁전을 짓고 호령하니 돈을 잘 쓰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 게 아닌지… 왜냐하면 Jelly Fish Tree(현지어로 maduse)라는 식물이 이미 교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식물은 꽃이 해파리의 모습과 같아 그리 붙여졌다는데, 차 농장을 한다고 개발하고 향료 채취한다고 나무를 베고 하니까 사람 손길이 닿는 정글에서 사라지고 지금은 절벽 위, 사람 손이 안 닿는 데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풍란 같은 존재인 거죠. 저 성을 짓느라 산에 도로를 내고 여기저기 땅을 팠을 텐데, 아부다비 술탄은 일 년에 며칠 머물지도 않는다니, 남들처럼 바닷가에 지으면 될 텐데… 뭐하러 저 짓을…

[정상에서 조망하는 주변 경관, 해안가에 만든 인공섬은 마치 두바이의 팜 메이주와 같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섬은 아틀란티스에서 왔다니… 꿈의 도시일 뿐.]

하산을 하려는데, 작은 새가 바람을 타며 움직이지 않습니다. Seychelles Falcon(현지어로는 Seychelles Kreitel)로 불리는 새인데 날개를 편 자세가 당돌한 독수리 같습니다. 원주민들이 작은 치킨이라며 잡아먹어서 지금은 귀하디귀한 새라는데, 왜 제 머리 위에… 트렌스 벨레는 행운을 가져온 사나이라면서 악수를 청하는데, 제가 행운을 가져가려나 봅니다. 그렇게 트레킹을 끝내고 해안가 크레올 식당을 찾았습니다. 맥주를 한잔하고 크레올 소스를 얹은 참치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맛도 별로, 내용도 형편없네요, 반을 남기니 밥값이 속 쓰리기만 합니다. 맥주 두 병에 130루피, 참치 스테이크 250루피, 결국 380루피를 냈는데, 그게 34달러(한국 돈 36,000원)입니다. 밥 먹은 거 같지 않아 길거리 좌판에서 야자 한 통 마셨더니 25루피($2)나 하네요.
모든 물가가 다른 여행 지역에 두 배인 건지 아니면 해안가는 여행객 상대라 비싼 것인지요… 수입을 물어보니 보통 300 ~ 350유로라고 합니다. 그 정도 수입이라면 이 물가를 견디기 어려울 텐데요… 세이셸 사람들은 어찌 사나요. 괜찮은 호텔은 일박에 $750달러, $1,000 넘는 호텔도 즐비하고 제가 묵은 중급 호텔도 $250 정도 합니다. 그렇게 번 돈은 대부분 외국으로 나가고 세이셸 사람들 생활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월급 높은 매니저나 관리인은 외국인이고 허드렛일만 현지인 몫이라서 대부분 월급은 거기서 거기라네요… 그러니 어제저녁의 혼란과 오늘 점심의 아쉬움은 아마도 여행 구역이어서 그런 거겠죠. 세이셸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은 어떨까요?

[세이셸에만 있다는 레드 파인애플. 달콤하기가 천상이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