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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남미의 첫 기착지, 리마

남미의 첫 기착지를 고민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멋지게 시작하려는 본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미는 잉카의 땅이고,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행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콜롬비아 지역의 총독, 발보아는 파나마를 가로질러 태평양을 발견하는 큰 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런 획기적인 공을 세웠음에도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아빌라의 모함을 받습니다. 새로이 발견한 땅을 스페인 왕실에게 바치지 않고 자신의 개인 왕국으로 만들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스페인 왕실은 발보아를 체포하여 사실 여부를 규명하라고 명령하고, 피사로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발보아를 체포했을 뿐 아니라 법정에서 그의 죄를 증언함으로써 발보아의 사형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피사로는 1513년 발보아 원정대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서 그의 증언은 발보아에게 결정적이었습니다. 배신의 대가로 피사로는 아빌라에게 사우다드 파나마(파나마 시티)의 시장 자리를 선물로 받습니다. 배신과 모략으로 얼룩지게 된 그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죠..

피사로의 황금 제국을 찾아 나선 첫 항해는 1524년에 시작됩니다. 하지만 큰 실패를 하고 돌아옵니다.
2년 뒤, 두 번째 항해에서 피사로는 적도를 넘어 툼베스(Tumbes)에 첫 기착을 합니다. 원정은 순조로워 보였으나 의외의 복병을 만나게 됩니다. 피사로가 원정에서 성공한 것을 우려한 파나마 총독 델 리오스는 원정대를 소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피사로는 결국 페루 해안의 갈로 섬(Isla de Gallo)에서 총독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서 피사로는 유카탄반도에 상륙한 코르데가가 타고 돌아갈 배에 불을 지르고 아즈텍을 향해 전진했듯이 피사로 역시 잉카에 남자의 인생을 걸게 됩니다. 그는 모래 위에 줄을 긋고 원정 대원들에게 소리칩니다.

“저쪽에는 잉카와 보물들이 있고 이쪽에는 파나마와 빈곤이 있다. 자, 한 사람 한 사람 용감한 카스틸냐인으로서 선택할 때이다.”

피사로가 카스틸냐인을 들먹인 건 이유가 있습니다. 초기 남미의 거친 바다로 향한 사람들 중에는 카스틸냐인 출신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는 투우와 카스틸냐인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카스틸냐 지방은 거친 환경 때문에 죽음이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죽음에 대하여 지적인 관심을 가지고 투우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남미로 온 것이고 그 수단은 전쟁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도덕적인 아량이나 품격은 무리해 보입니다. 정규군이 아닌 가족의 생존을 위해 돈을 필요로 하는 가장들로 이루어진 원정대가 갖는 한계가 초기 남미 정복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몽골 비사에 보면 발주나 맹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칭기즈칸은 매복에 걸려 며칠을 쫓기다 겨우 추격군을 따돌리고 발주나 계곡에 숨어듭니다. 이때 끝까지 따른 19명의 추종자들을 향해 칭기즈칸은 진흙탕 물을 뜨며 소리칩니다.
“우리는 이 물을 나누어 마실 것이다.”
그들에게 칭기즈칸이 심어준 미래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입니다.

피사로 역시 모래 바닥에 줄을 그으며 미래의 보상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다른 차이점이라면 피사로는 숭고한 길을 말하지 않았고, 칭기즈칸은 숭고한 길만을 이야기했습니다.

남미의 역사는 숭고한 길을 말하지 않은 두 남자, 코르데가와 피사로의 손에 의해 재단되기 시작하니 임자를 잘못 만난 남미의 불행입니다. 이때 피사로가 그은 선을 넘은 사람은 13인이고 후대의 사가들은 그들을 “가요의 13인”이라고 부릅니다. 피사로는 원정대가 돌아간 후 남겨진 13인과 함께 7개월을 버티고 알마그로가 이끌고 온 지원 부대에 구조되어 파나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에스파냐로 건너가 이사벨 왕비(콜럼버스를 후원한 이사벨 여왕의 손녀)의 승인을 받아 다시 원정대를 꾸려 본격적인 잉카 원정에 나섭니다.

1530년 12월, 파나마 항구를 떠난 168명의 남자들, 인생 역전의 복권을 챙기듯 기대에 들뜬 남자들에게 선금만 주어졌을 뿐 잔금은 없었습니다. 원정대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므로 위험합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는 5대의 함선에 265명이 출발했지만 3년 뒤에 돌아온 사람은 고작 18명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168명의 남자에게 피사로가 약속한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신대륙 원정대는 스페인 하층민들에게 대단한 선물이었습니다.

우석균 저 ‘잉카인 안데스’에는 당시 정복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의 임금은 금 90파운드 혹은 은 180파운드인데, 이는 일반 선원들의 180년 치에 해당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사로가 그만한 돈을 어디서 구했는지 또 그만큼의 임금을 실제로 주었는지 아니면 그만큼을 주겠다고 구두 약속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정은 대단히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왕실에서야 원정비의 일부만 감당하고 나머지는 권리라는 물건을 대신 내놓습니다.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와 맺은 산타페 조약과 같이 조약을 맺으면 그뿐입니다. 그럼 피사로는 그 많은 돈을 어디서 얻어왔을까..

반은 기대라는 물건으로 만들어 원정 대원들에게 팔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도 모자란 비용은 세비아의 상인들에게 투자를 받습니다. 세비아의 상인들 역시 그가 가져온 꿈을 산 것이니 일종의 위험한 투자인 셈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구매하는 일, 모든 사물뿐만 아니라 이미지, 심지어 꿈과 기대마저도 상품 거래로 일반화시키는 자본 속성은 이미 그때부터 나타난 것입니다. 위험과 수익을 규격화시켜 하나로 묶어 팔고 그것에 투자하는 자본가의 탄생은 마치 정크 본드를 만들어낸 금융 공학자와 이를 구매하는 현대의 투자자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피사로와 칭기즈칸이 걸을 길의 차이입니다.

사람을 많이 죽였음에도, 구 제국을 멸망시켰음에도, 새로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음에도 피사로는 한낱 탐욕스러운 정복자, 탈취자의 한계를 못 벗어납니다. 심지어 역사 학자 로만 자모라(Roman Zamora)는 피사로 형제를 일컬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타국의 그 누구보다 사악했던 인간들로 동료들과 함께 에스빠냐 국왕에게 최대의 오명을 남겼다.”

큰 줄기에서 보면 하나의 구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칭기즈칸도 일자무식이고 피사로 역시 이름도 못 쓰는 무식쟁이입니다. 사람을 죽인 수로 보면 칭기즈칸에 비교되지도 않습니다. 칭기즈칸이 발주나에서 재기했듯이 피사로 역시 가요 섬에서 7개월을 생존할 만큼 집념과 인내력이 대단한 인물입니다. 분명 두 사람은 보통의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한 명은 위인이고 한 명은 잡놈일까요?

역사 속 진실과 대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서 추측해 봅니다. 피사로가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닐까요? 피사로의 재물을 빼앗아가려 한 스페인 왕실이나 정치 세력이 그의 평가를 낮추지 않았을까요?

피사로가 왕이 되었다면 그를 기록하는 사가들의 필체는 화려하게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승자의 기록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피사로, 역사의 주인공임에도 철저하게 주변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그를 통해 남미를 바라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남미 대륙에 첫발을 내디디며 대륙의 주인이었던 잉카 제국을 생각해 봅니다. 한낱 도둑 떼에 멸망한 엉터리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래서 피사로를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잉카 제국은 위대한 피사로에 의해 멸망한 구시대의 맹주였습니다. 구시대의 맹주는 새로운 시대의 영웅에 의해 사라는 게 역사의 법칙이니 잉카 제국의 소멸과 피사로의 등극은 역사의 순환입니다. 역사의 법칙에 무슨 연민이 있고 폄하가 있습니까, 순리인 것을요, 남미를 폄하시키지 않기 위해 피사로는 한낱 자기 주머니만 채우다가 만 도둑이 아닌 새로운 시대를 연 역사적 인물로 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남미 여행을 시작합니다.

리마의 첫날, “왜 피사로는 리마를 자기가 통치하는 땅의 수도로 삼았을까?” 그런 질문을 안내자로 나온 ‘마르곧’이라는 여성에게 건넵니다. 그녀는 통상적인 사실에 대해 답을 하는데 그 안에 열등감이 왜 보일까요… “피사로는 새로운 수도를 세우기 위해 적당한 지역을 잉카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잉카인들은 피사로를 골탕 먹이려고 리마를 추천했다.” 그녀의 설명이 옳은 것일까요? 척박한 기후에 안개까지 많이 끼어있어 농작물 재배가 전혀 안 됐던 쓸모없는 땅이기 때문이라는 부연 설명을 하지만 기후가 좋고 작물 재배가 잘 되는 페루 남부나 북부를 추천하지 않고 리마를 추천한 이유로 단지 골탕 먹이기 위해 그랬다는 것은 자기 위안적 열등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리마가 수도로써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추천한 잉카 귀족이 봉변을 당할 텐데 그리 허술하게 추천했을까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잉카는 피사로의 식민 통치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포하거나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지만,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초기의 스페인 식민 정권은 잉카의 정치 세력과 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디 가나 좌우가 있듯이 집권 세력이 있고 반대 세력이 있습니다.

잉카인이 인정하는 마지막 잉카 아따우왈파(잉카의 왕) 이후에도 잉카 제국이 공식적으로 문을 닫기까지 스페인이 내세운 잉카(13~16대)는 아따우왈파의 이복동생이거나 그 집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따우왈파의 배다른 동생이 망꼬잉카를 새로운 잉카로 옹립하고 아따우왈파를 종교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시키는 일련의 과정에 피사로는 아따우왈파에게 죽임을 당한 배다른 형이자 쿠스코 세력을 대표하는 ‘우아스카르’ 집안과 손을 잡고 추진합니다.

쿠스코와 키토의 대립한 정치 세력 이외에도 잉카를 멸망으로 몰아간 세력은 스페인 편에서 여러 피지배 민족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특히 까나리인의 경우는 유별납니다. 까나리인은 잉카의 정복왕 뚜박 유방끼(10대 잉카)의 아들을 낳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잉카를 제국의 반석에 올려놓은 파차쿠팩(9대 잉카)은 에콰토르 남부인 또메밤바를 정복합니다. 하지만 까나리인의 저항은 파차쿠팩의 뒤를 이어 뚜박 유방끼가 잉카가 된 후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잉카는 현장 통치의 전통이 있어 뚜박 유방끼의 경우 잉카(황제)임에도 통치 수도를 또메빰바로 옮기고 그곳에 머무릅니다. 즉 까니리인을 정복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임시수도로 삼아 까나리인 뿐 아니라 잉카를 통치한 것입니다. 심지어 뚜박 유방끼는 까나리인을 회유하기 위해 까나리 여인을 아내로 삼고 아들까지 낳습니다. 그가 11대 잉카인 와이나 까박입니다.

와이나 까박은 잉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 까나리인들과 잉카의 군대를 몰아 적대 관계인 카랑키인의 근거지인 키토를 정복합니다. 새로운 정복지를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 와이나 까박은 통치 수도를 또메빰바에서 키토로 옮겼고 카랑키 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그 역시 카랑키 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마지막 잉카로 불리는 아따우왈파입니다.

에콰도르를 남북으로 분할하며 지배하던 까나리인과 카랑키인은 서로 적대 관계였고, 적대 관계인 두 부족이 잉카 왕실과의 혈연관계를 맺으며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귀족 전통 세력과 신흥 세력의 대립이라는 단순 관계를 넘어 한층 복잡해진 갈등 관계를 낳습니다. 피사로는 이들의 갈등 관계를 이용해 잉카 제국을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잉카 제국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우호적인 정치 세력과 연정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니 마치 스페인과 잉카가 무관한 체 말하는 페루 사람들의 언어 구사는 자기 연민일 뿐인 거죠…

누가 잉카의 역사를 썼을까요? 잉카는 문자가 없었으니 후대에 쓰여진 기록들입니다. 대부분 수도사에 의해 남겨진 기록이어서 신앙인의 양심이 많이 반영된 기록들인지도 모릅니다. 또 주관적인 감정들이 주류를 이루는지도 모릅니다.

구대륙의 기록은 대부분 사가들에 의해 냉혹하게 정리되니 분명 글의 내용과 맛이 다를 것입니다. 잉카의 역사적인 편견이나 입장은 초기 기록이 가진 한계에서 오지는 않았을까요, 저 역시 남미로 향하기 전 읽은 책이 20여 권에 달합니다. 일부 책은 저에게 남미의 불행이 이해되도록 안내했고 가끔은 잉카에 연민을 느끼게도 합니다. 무슨 근거인지 모르겠습니다. 글 쓰는 자의 양심이 지나쳐 분별력을 잃게 하기도 합니다. 정말 잉카 제국을 불쌍하게 보아야 하는 건가요? 제국의 멸망은 구대륙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흥망성쇠인데… 잉카만의 사건이고 불행은 아닙니다. 잉카가 멸망을 보는 시각은 도둑놈들에 의해 어이없이 멸망한 안쓰러움에서 오는 오류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잉카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백성들은 행복했을까? 잉카시대 제국의 신민이 행복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식민 통치의 과정이 더욱 혹독했을 뿐, 잉카가 파라다이스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억울해하거나 마치 무관한 일로 바라볼 게 아닙니다. 그저 역사적 사실이고 역사의 유산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남미를 바라보는 애절함, 연민, 누가 심어 두었든 내 스스로 심었든 그만두어야겠습니다. 잉카 제국이 파라다이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잉카의 연민을 접어두고 역사 속 사건들과 하나 둘 씩 대면해야겠습니다.

PLAZA DE ARMAS
중앙 광장이라 불리우는 역사의 중심지, 아르마스 광장

리마는 1535년 피사로가 건설을 시작했고, 282년 동안 페루의 부황령이 있었던 식민 도시의 심장부이며 스페인 식민정부의 중심지이자 보루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남미에서 가장 잘나가던 도시였던 셈입니다.

리마의 첫날은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무기의 광장)에서 시작합니다. 1977년부터 플라자 데 마요르(Plaza de Mayor) 즉, 중앙 광장으로 불리는 이 광장에는 역사의 중심지답게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피사로가 직접 주춧돌을 놓았다고 알려진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de Basilica)에 먼저 들어가 봅니다. 바로코와 르네상스의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외형은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성당 안에는 피사로의 묘가 있다고 알려져 있어 그 앞에서 사진 한 장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 영전에 선 것 같은 진지함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그에게서는 도둑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아서인가 봅니다.

바실리카 대성당을 나와 까따콤베(초기 기독교의 지하 무덤)로 유명한 프란시스코 수도원(Sanfrancisco Church)을 찾아갑니다. 스페인의 문화적 풍요는 가톨릭만의 영향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지배와 북아프리카 모로코 왕조의 영향이 역시 큽니다. 가톨릭의 완고함과 이슬람의 이질적 교합 거기에 더해져 아프리카의 오묘함이 배가된 것이고, 스페인에서도 남쪽으로 갈수록 색이 짙어집니다. 안달루시아는 그런 땅입니다. 안달루시아풍의 건축 양식이라는 설명에 귀가 번뜩합니다. 정복의 시대가 어느 정도 끝나고 피사로가 리마를 건설할 때쯤이면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 선원들은 남미에 대거 진출합니다.

초기의 카스틸냐 사람들의 손에 의해 남미는 파괴되었고 안달루시아 사람들에 의해 재건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올바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정복과 파괴는 카스틸냐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후의 신도시 건설에는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참여하니 표현이 좀 과하다 뿐이지 그리 틀려 보이지는 않습니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부터 모자이크가 아닌 아라베스크 모양이 기둥과 벽을 장식합니다. 이 수도원에 들어서면 우선 두 가지의 볼거리로 유명합니다.

하나는 지하 무덤인 까땀콤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종교 박물관입니다. 지하 무덤은 성직자와 돈 있는 신도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합니다. 성스러운 자리에 묻히면 천당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든 무덤입니다.

MUSEO RAFAEL LARCO HERRERA
세계에서 가장 큰 사립 박물관인 라르꼬 박물관

몇 년 전 카일라스 파콜(카일라스를 밖으로 한 바퀴 도는 3일간의 순례)을 같이 하던 할아버지가 머물던 호텔 로비에 가족들에게 업혀 들어왔던 기억이 납니다. 인사불성이 된 채 할아버지는 숨을 헐떡였고 다시 방으로 옮겨 눕혀졌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할아버지는 그날 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성스러운 땅에서 운명하셨으니 큰 축복이라며 아버지의 죽음을 반겼습니다. 그런 믿음이 수도원 아래 지하 무덤을 가능케 했고 현재 보관하고 있는 75,000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부패하지 않게 처리한 시신을 6층이나 올려놓았다고 하니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프란시스코 수도원이 성스러운 장소로 남아 있었으면 좋으련만 1996년 수도원이 까타콤베를 관광지로 개방하기 위해 유골을 현재의 상태로 정리하였다고 하니 영혼은 유골을 떠나 천당에 갔으려나 궁금합니다.

수도원을 나와 18세기 풍의 나무 발코니가 아직도 볼거리로 회자되는 대주교 관저(Archbishop’s Place)를 지나 라끄르 에레라 박물관으로 향합니다. 라끄르 박물관은 1926년에 문을 연 세계에서 가장 큰 사립 박물관으로 55,000점의 토기와 금세공품, 미라가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1인치에 398올의 가는 색실로 만들어진 일명 “빠라카스 직물”로 불리는 천이 전시되어 있다고 안내자 마르곧은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박물관에 전시된 “빠라카스 직물”이 1인치에 198올인 걸 감안하면 라끄르 에레라 박물관에 전시된 빠라카스 직물은 페루에서 아주 귀한 전시물임이 분명합니다.

널따란 정원을 가진 박물관은 남미 역사를 고대부터 이해하기 쉽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느 방에서인가 만난 치무 문명의 장례 장식품은 이집트 역사박물관에서 만나 투탕카멘스의 황금 마스크만큼이나 화려하고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화려하고 거대한 황금 장식을 개인이 소장하다니, 큰 방 하나를 몽땅 차지한 장식은 어둠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자태로 빛이 납니다.

황금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어둠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이유와 매한가지겠지요, 그렇게 뛰어난 금세공 능력과 풍부한 금을 가졌으니 카스틸냐인들의 탐욕을 나무랄 건 아닌 듯합니다.

SOUTH AMERICA TRAVELOG 1
화려한 장식의 거대한 황금 마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