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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 아옌데, 피노체트, 네루다

칠레를 소개하는 말로 3W와 3F를 꼽습니다. 3W는 좋은 날씨(Weather), 아름다운 여성(Woman), 질 좋은 포도주(Wine)가 유명하다는 말이고, 3F는 생선(Fish), 꽃(Flower), 과일(Fruit)이 많이 생산된다는 표현의 압축입니다.

칠레는 지구상에서 가장 길게 뻗어있는 나라입니다. 안데스산맥을 따라 길게 내리뻗은 칠레의 북쪽은 삭막한 사막과 소금 대지이고 중앙은 산티아고 주변으로, 온화하고 비옥합니다. 반면 푼타아레나스 주변의 파타고니아는 극지방의 혹독한 기후를 가졌으니 일주일 만의 여행으로 세상의 끝에서 끝을 여행할 수 있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또한, 현재는 남미에서 가장 부유하고 안정된 나라이기도 합니다. 산티아고 공항에서 만난 안내자 안네(Anne)는 독일 이민 3세인데, 다양한 혈연관계를 가진 여성입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고 혼자 벌어 어머니와 두 딸을 부양하지만,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를 구사하며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바쁘다고 자랑합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일본 관광객이 줄고 중국 관광객이 늘어 중국어를 공부해야겠다고 하니 그녀의 언어능력이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그녀의 언어능력은 환경이 준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독일계 아버지와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파나마의 미국계 회사에 취직하면서 가족이 전부 파나마로 이사를 하였고 그곳에서 영어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관광을 전공하며 일본어를 이수했다고 합니다. 10년 이상 영어를 배우고도 햄버거 하나 제대로 주문 못 하는 저와 비교해보면 부러울 따름입니다. 멋진 금발 머리를 질끈 묶고 칠레에 대해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적극적인 여성을 만나니 이틀간 산티아고와 발파라이소를 찾는 저의 역사여행에 그녀가 동승한 것이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산티아고의 첫날, 반나절의 도보 관광을 시작합니다. 산티아고는 피사로의 수하인 발디비아(Valdivia)가 세웠고 독립의 영웅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의 도움을 받아 베르나르도 오히긴스(Bernardo O’Higgins)가 독립을 쟁취하며 독립 칠레의 수도로 현재까지 이어집니다. 남미의 도시가 으레 그렇듯 산티아고의 중심지에도 아르마스 광장이 있습니다.

광장 주변을 돌며 도시의 역사를 더듬어 가는 시티투어는 대통령 궁인 모네다 궁에서 끝이 납니다. 모네다 궁은 불행했던 칠레의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이고 남미 최초의 좌파 민선 대통령 아옌데, 참여 시인 네루다, 그리고 군부독재의 상징 피노체트가 소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 낸 현장입니다. 모네다 궁이 기억하고 있는 그날의 현장으로 가봅니다.

칠레는 독립 후에도 지도층의 자리바꿈만 있었을 뿐, 토지를 지배하는 소수의 지주와 광산산업을 지배하는 독과점 자본에 의한 지배체제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독립국가가 되면서 군인, 관료, 전문가 집단에게는 지위 상승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국민 대부분은 식민정부나 독립정부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마르크스(Karl Marx)는 “역사는 반복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본 것일까요… 칠레는 마르크스의 명언대로 펼쳐졌으니 말입니다.

칠레는 나스카 판이 아메리카 판을 밀어붙이며 안데스를 들어 올리는 동안 대지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엄청난 열에너지가 풍부한 광 물질을 만들어 냈습니다. 미국 자본은 칠레가 어리숙하던 시절 구리광산 개발에 적극적으로 끼어듭니다.

스페인이 볼리비아에서 은을 퍼갔듯이 미국도 칠레에서 구리를 퍼갔는데, 은이든 구리든 열심히 캐내면 그 이득은 고스란히 개발한 나라로 빠져나가고 노동자들에게 남은 대가는 병든 몸과 헐벗음 밖에 없으니, 삶의 막바지에 몰린 광부들은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체 게바라는 2번째 남미 여행에서 남미의 구조적인 모순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스스로 변화된 삶을 선택합니다.

칠레, 에콰도르 등 사회적 저항이 빈번한 지역에 머물며 시위에 합류하고 사회운동가들과 교우하며 인생의 행로를 바꿉니다. 그가 혁명가로서 다시 태어나겠다고 결심하게 한 계기가 바로 칠레 광산의 파업이었습니다.

칠레 광산을 개발한 미국 자본은 6개월 만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광부들의 임금 인상에 인색했습니다. 풍요로운 중산층 의학도의 입장에서 볼 때 광부들이 올려달라는 급여는 너무도 적은 금액이었는데 그들의 파업을 막기 위해 회사가 고용한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더 많이 소요되는 이해 못 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회사는 한번 들어주면 계속 밀린다는 생각에 비용보다 명분에 집착하는 비합리성을 보였고 그런 시대착오적인 역사의식이 점점 문제를 키우면서 남미 혁명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서구가 남미에게 보여준 모습은 탈취였고 탈취한 원재료로 물건을 만들어 재화를 늘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저렴하게 탈취할수록 이익이 크고 자국의 부가 증가하는 시대에 남미는 희생물이었습니다. 미국은 스페인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런 나라였습니다. 일방적인 희생은 오래갈 수 없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으므로 21세기에는 ‘공존’이 지배의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1960년대 공존이란 단어는 멀리 있었고, 그런 일방적 관계를 거부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선거혁명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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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디비아 동상

1950년대 칠레의 보수정권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꾀하며 필요한 자본을 외국에 의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3공화국이 해외 차관을 도입하여 경제계획을 추진하던 방식과 같았을 겁니다. 대부분의 자본은 미국에서 차입되었는데, 그 결과 1958년 칠레에 대한 전체 외국 투자 중 미국 자본의 비율이 80%가 넘었고 1960년대 초에 칠레의 산업은 100개의 기업 중 61개 기업이 외국자본에 지배를 받을 만큼 대외종속이 심화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우리나라와 칠레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엔 광산자원이 적지만 칠레엔 풍부합니다. 우리나라는 우수한 인적자원이 풍부하지만, 칠레엔 교육을 받지 못한 원주민과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상류층 주를 이룹니다. 비슷한 것도 있죠, 미국이 배후에 있고 미국의 의지로 운명이 결정된 면이 적지 않습니다.

광산업뿐 아니라 산업 전반을 미국 자본이 지배하면서 칠레는 구리를 팔면 팔수록 외채가 증가하고, 상환을 위해 신규 차관을 또다시 도입해야 하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듭니다. 정부는 항상 문제점만을 이야기합니다. ‘자본이 빠져나가면 공장이 문을 닫는다. 그러면 너희들은 빵을 살 수 없다.’ 그 말에 속아 한발 머뭇거리면 그런 상황은 더 심화되고 해결은커녕 거칠어지기만 합니다.

정치인은 현재의 다급한 문제에만 매달리고 근본적인 해결에는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문제가 되면 보수적이 된다고 하는데, 그 이면엔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주변이 문제와 단단히 결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역사란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관(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래 보고 멀리 보아야 하는 이유는 어떤 문제라도 원인이 있기 때문에 현재만을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보수정권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의롭게 책무를 다한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문제는 선택하는 수단의 차이입니다. 보수가 선택하는 대안은 조금씩 다친 부위를 약 발라가며 낫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가 아무는 속도보다 병의 진행이 더 빨라지면 그런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너무 멀리 와 있고 처음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을 때 조금씩 쉬운 방법을 찾아보지만 잠시 모면할 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혁신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치료의 주체가 준비되어 있을까요?

함석헌 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왔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졸업하고 사회의 주류가 되었는데, 한국 사회의 민주화 수준은 그만큼 올라갔는지 의문이다.”

또한, 서강대학교 최진석 교수는 “이것이 자신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고 사회의 개혁을 부르짖었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면서 자연히 그 환경에 동화된 것이 원인”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역사의식에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늘 발생하고 대안도 항상 있습니다. 선택하는 대안은 득이 될지 실 이 될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먼 관점에서 보면 답은 조금 쉬워집니다.

미국도 역시 이런 문제가 있었고 갈등이 첨예화될 때 나름의 대안을 선택해 해결했습니다. 위키백과는 미국이 취한 대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셔먼 독점금지법을 사용하여 대기업들이 무분별하게 비대해지는 트러스트를 견제함으로써 트러스트의 폐해를 막았다. 자본주의가 도를 넘어 거대 기업의 횡포조차 감시, 관리하지 못하면 미국에도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가 발전과 성장을 옹호하는 공화당의 대통령이었고 그 시점이 자본의 힘으로 미국의 성장을 구가하던 1902년이었다는 점을 볼 때 그의 역사를 보는 관점은 놀라울 만큼 정확하고 합리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대 기업의 횡포가 남미의 영양을 쪽쪽 빨아가는 걸 정부가 막지 못한 나라는 모두 혁명이 일어났고 사회 정권이 들어섰으며 이를 거부한 보수 세력과 내전을 치르며 국민과 나라를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산업화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을 가져오고 결국 공산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역사 순환에서 미국이 소련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건 자본과 방종을 제압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공로가 아닐는지요…

자본의 방종을 막지 못한 칠레는 1970년 혁명이 아닌 선거에 의한 최초의 좌파정권이 남미에 들어섭니다.

모네다 궁 앞 ‘헌법광장’에는 남미 최초의 좌파 민선 대통령 아옌데 동상이 있습니다. 동상을 돌아보니 아래에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1973년 9월 11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1973년 아옌데에게 아니, 칠레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날을 기념할까요? 아옌데의 개혁 정책은 외국자본과 지주를 향합니다. 우선 광업, 국가 기간산업, 금융업을 국유화하고 농지개혁을 추진하여 1,300여 명의 대토지 소유자에게 집중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합니다. 그 효과는 사회 전반에 긍정적으로 나타납니다. 개혁 정책으로 국민 총생산(GNP) 증가율은 7%로 높아졌고, 물가인상률은 37%에서 18%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집니다. 그런데 한쪽이 행복하면 한쪽이 불행해지는 게 세상 이치라서, 정치는 당파를 대변한다고 하던가요?

재산을 잃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점점 거세지고 이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미국이 끼어듭니다. 미국은 구리광산 국유화 조치의 최대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옌데 정부는 보상이 아닌 몰수의 방식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칠레 입장으로 보면 투자금의 수십 배를 가져갔으니 그냥 국유화해도 당연하게 생각될 테고요 미국은 ‘아무것도 없는 놈들 돈 들여 광산 만들어 주었더니 생으로 빼앗아?’ 같은 억울함이 있었을 겁니다. 어쨌거나 1971년 지방선거에서 칠레 국민은 좌파 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아옌데의 개혁 정책은 힘을 받습니다. 더욱이 칠레의 성공은 쿠바에 이어 남미 전역으로 퍼져나가 반미의 동조화 현상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미국의 선택도, 기득권층의 선택도 하나로 모아집니다. 아옌데 정권의 전복이죠.

미국은 칠레 경제를 봉쇄하고 국제 구리 가격을 조작해 폭락시켜 칠레 경제를 위축시킵니다. 국내 자본가들은 상품을 제한적으로 풀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국민을 불안하게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옌데는 낙농국가인 칠레가 아이들에게 먹일 우유가 없어 영양실조로 죽어가게 한다며 15세 이하의 아동에게는 정부가 우유를 무상으로 지급하겠다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당시 칠레는 영아 사망률이 높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그런데 다국적 회사인 네슬레가 유통되는 우유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었고 네슬레는 국가가 저렴하게 구매해 무상으로 지급하면 제값에 팔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에 우유 공급을 거부합니다. 결국, 아옌데의 무상 우유 공급 정책은 실패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득권의 저항으로 사회불안과 경기 침체가 지속되며 아옌데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때쯤 보수층과 군부는 아옌데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고 때로는 부정하며 사회 안정의 대안세력을 스스로 홍보하기 시작합니다.

아옌데 정권은 점차 구체화하는 군부의 쿠데타 위협에 맞서 국민의 선택을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하고 그 일정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을 비롯한 주요 육군 지휘관들에게 알립니다. 군부와 보수파는 국민투표에서 아옌데 정부가 승리하면 아옌데 정부를 부정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국민투표 전날인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9월 11일 새벽, 해군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군이 발파라이소((Valparaiso)를 점령하고, 3군 참모총장과 경찰국장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으니 아옌데 대통령은 24시간 이내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성명서 발표가 끝나자 쿠데타 군의 폭격기가 모네다 궁 상공을 선회하면서 아옌데 대통령에게 외국으로 망명할 것을 위협하고 산티아고에 진입한 쿠데타 군이 산티아고의 주요 시설을 접수한 가운데 12시를 맞이합니다. 모든 방송국이 쿠데타 군 수중에 있었지만, 라디오 방송국은 아직 쿠데타 군이 접수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과 연결된 12시 대통령과의 담화시간에 아옌데는 비장하게 외칩니다.

“지금 이 순간 폭격기가 머리 위를 날고 있습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칠레 민중이 보여준 충성심에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나는 칠레 대통령으로서 명예로운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Viva Chile!)

민중 만세! (¡Viva el Pueblo!)

노동자 만세! (¡Viva los Trabajadores!)”

그는 대통령궁 경비대를 밖으로 내보내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찾아온 40여 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모네다 궁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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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다 궁 앞의 아옌데 동상

우리나라에도 암울한 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요… 미국은 톡톡히 빚을 갚았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이르러서야 미국도 후회한다고 합니다. 민주화만이 미국 편으로 끌어오는 가장 확실한 정책이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몰랐죠…

미국 국무부는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날 “거듭 강조하거니와 미국 정부와 미국 정부 내 어떤 기관도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발표합니다. 그러나 최근 비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 국방부 등의 관련 극비문서에 의하면, 미국의 아옌데 정부 전복 공작은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닉슨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의 지시를 CIA 칠레 지부에 전한 비밀전문은, ‘아옌데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확고한 정책’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비밀문서엔 여러 가지 내용이 적혀있는데,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48시간 이내에 끝낼 수 있는 쿠데타 계획을 세워라’, ‘쿠데타 전문가를 총동원하라.’, ‘칠레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공작금은 1,000만 달러로 하되 필요한 경우 더 사용해도 좋다.’는 등의 내용도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헨리 키신저는 중국과 핑퐁외교를 성사시킨 뛰어난 외교관입니다. 그는 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성공사례를 몰랐을까요?

식민 시대부터 자라난 독점적 세력이 아닌 국민과 손을 잡고 민주주의의 성숙을 도왔다면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칠레는 미국의 든든한 우방이자 경제 동업자가 되었을 텐데… 꼭 피를 보고서야 적합하지 않은 파트너를 찾으니 말입니다. 정치철학자로서 아렌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의 죽음 이후, 서구 철학의 전통은 철학과 정치를 스스로 분리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실천했던 사회적 역할, 즉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신파적 기능을 외면하였다고 진단하였다.”

대중은 어리석지만, 불편과 편안함을 못 느낄 정도로 아둔하지 않습니다. 대중을 아둔하게 하는 방안은 공포밖에 없지만, 공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공포도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피노체트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3개월 동안 공산당원과 좌익계 인사 1,800여 명을 공개 처형할 만큼 공포통치를 합니다. 그는 통치 기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나라에서 나뭇잎 하나라도 내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500개에 달하던 국영기업의 절반 이상을 무료로 원소유주들에게 반환했고, 나머지 국영기업도 공개입찰을 통해서 매각합니다. 또 아옌데 정권에 의해 시행되었던 토지개혁을 파기하고 몰수되었던 토지를 본래의 지주에게 반환시켜 줍니다.

피노체트의 정책을 보면 그의 뒤에 누가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쿠데타로 가장 재미를 본 건 구리광산을 다시 가져간 미국이었을 테니 헨리 키신저가 투자를 잘못한 거 같지는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피노체트 통치 시절 칠레는 사회불안이 없고 고도성장을 했던 시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쿠데타가 발생했던 1973년 미국과 보수층의 조작이었을지라도 물가는 500%나 뛰었습니다. 쿠데타가 성공하고 안정되기 시작하자 1976년엔 180%로 하락하고, 1982년엔 10%대로 진정되었으며, 경제성장률은 1976~1981년 동안 7%대를 유지했습니다. 수치로 볼 때 아옌데의 초기 성공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불안을 낳았고 그 불안을 잠재운 구세주가 피노체트이니 진정 누가 구세주인지 혼란스럽습니다. 피노체트 집권기에 경제를 담당한 관료들은 시카고 대학 출신의 자유시장 경제주의자들(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라고 함)입니다. 그들은 자유무역, 정부 개입 축소, 시장 자유화 등 우리에게 익숙한 정책들로 경제를 다시 수립했고 위의 수치대로 경제를 회복해냅니다. 그런데 따자고 보면 자율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피노체트 정부의 강력한 독 재아래 이룩한 경제성과입니다. 성과에 급급한 정책은 단기간엔 효과가 나타나지만 멀리 보면 효과보다 문제가 더 많습니다. 성과를 올리기 위해, 성과를 낼 수 있는 일부 대자본 중심의 산업구조를 낳고 효율성에 집착하다 보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더 많이 만들어 냅니다.

우리나라가 겪는 문제이기도 하고, 오늘날 전 세계가 겪는 문제라서 칠레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피노체트는 사람만 죽인 게 아니고 민주주의를 퇴보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결과를 조금 더 빨리 칠레에 가져온 것입니다.

시장의 문을 열면 돈이 들어오니 갑자기 자산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모두가 현재보다 부유해집니다. 일종의 상업혁명이 일어나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그 돈이 필요한 곳 이외 다른 곳에 가지 못하도록 길목을 막지 않으면 사방으로 스며들어 세균같이 번식하고 나중엔 내 주머니를 갉아먹습니다. 피노체트의 통치 초기는 미국의 돈이 들어와 칠레를 행복하게 해주니 사람들은 어느새 아옌데를 잊었을 겁니다. 그런데 국민이 아옌데 친구들의 손을 들어준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민주화 지수가 높아지며 칠레 국민은 피노체트를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거세지는 퇴진 요구에 피노체트는 1988년 군부정권의 집권 연장을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하고 54%의 반대에 부딪혀 군사정권은 막을 내립니다. 그는 정권을 내려놓았음에도 종신제 상원 의원으로서 면책권을 부여받았고 상원 의원 47명 중 9명의 상원 의원을 자신이 임명할 수 있게 법을 고쳐놓습니다. 민주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칠레에선 일어난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법, 법은 만인의 법이며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정신을 넘어선 특별한 일입니다.

피노체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파트리시오 아일윈(Patricio Aylwin)은 국민의 요구에 따라 쿠데타와 군부독재 17년 동안 일어난 인권유린 사태를 조사할 레틱(Rettig)위원회를 만들고, 공식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군 관계자가 사과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대화를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피노체트는 “군인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다치는 일이 생기면 그날로 헌법질서는 끝날 것이다.”라고 위협합니다. 피노체트의 말 한마디에 대통령도, 레틱 위원회도 과거사 청산을 과제로 남겨 놓은 채 끝내고 말았으니 피노체트의 권력보다는 정치인들의 무력함을 탓할 수밖에요…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는 “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 라고 말했다는데, 1988년의 칠레는 1970년만큼 용감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모양입니다.

피노체트는 많은 젊은이를 죽였지만, 그는 천수를 다하고 2006년에야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방년 91세였습니다. 몇 번 법정에 서고 재판을 받다가 건강을 이유로 중지되는 아주 사소한 수모를 몇 번 겪었지만, 그에게 가해진 신체적 제약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대통령은 호되게 당한 꼴이죠, 그만큼 대한민국의 민주화 지수가 높다고 봐야 합니다. 정의를 세우는 힘은 국민의 민주주의 의식에 달려있으니까요… 피노체트로부터 자유로운 칠레는 2000년에 가서야 이루어집니다.

이 선거에서 리카르도 라고스(Richardo Lagos)는 51.32%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아옌데 이후 18년 만에 사회주의 정권이 칠레에 들어선 것입니다. 라고스는 이전 대통령과 달리 과거사 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그는 피노체트의 면책권을 박탈해 피노체트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늦었죠… 어느덧 90세를 바라보는 피노체트가 무슨 수치심을 느끼고 어떤 반성이 가능할까요. 피노체트 재판은 치매라는 건강상의 이유로 종결되고 맙니다. 그래도 법정에 세우고 죽음을 맞게 함으로써 칠레 국민의 자존심은 세워진 것입니다.

라고스의 당선 첫 성명은 “칠레 자존심의 대표이신 오르텐시아 여사, 이 자리에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입니다.

오르텐시아 여사는 바로 아옌데의 미망인입니다. 피노체트의 등장과 몰락을 지켜본 여사의 마음은 뭉클했을 겁니다. 라고스는 피노체트 집권 시절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아옌데 정권하에서 중남미 사화과학위원회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 군에 체포되었으면 공개 처형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는 무사히 아르헨티나를 거쳐 미국으로 도피했고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중 칠레의 민주화를 위해 1978년 귀국을 결행하고 정치활동을 시작합니다. 그가 전 국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1986년 피노체트 암살사건이 발생합니다. 라고스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그의 집에 3, 4명의 무장 경찰이 들이닥치고 그는 체포됩니다. 그가 체포되고 몇 분 후 정치경찰(CNI)이 그의 집에 들이닥칩니다. 정치경찰은 일반 경찰에게 체포된 라고스를 어찌하지 못했지만, 그날 밤 정치경찰은 손에 쥔 명단대로 4명의 집을 찾아갔고 라고스를 제외한 3명은 그날 죽임을 당합니다. 라고스를 체포한 경찰은 그가 대학에서 가르치던 경제학과 제자였고 그는 정치경찰의 명단에 라고스가 있는 걸 보고 한발 앞서 그의 집을 들이닥쳐 체포한 것입니다. 정치경찰은 불법 살해를 할 수 있지만, 경찰은 공식절차를 밟기 때문에 라고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후에 대통령이 됩니다.

피델 카스트로(Castro, Fidel) 만큼이나 극적이고 절묘합니다. 카스트로 역시 첫 무장봉기 때 현장에서 체포된 테러리스트는 대부분 즉시 사살했지만 마침 카스트로를 체포한 진압부대의 분대장이 초등학교 동창이어서 현장 사살이 아닌 법정으로 넘겨졌고 재판 과정에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된 전례가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하늘이 정한 운명의 수혜자 같습니다.

독재자의 특성을 [자신에 대한 비판을 참지 못하고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위험이 있다] 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나르시시즘의 심리유형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프로이트 의사는 나르시시즘을 “자기도취이며 타인의 생각에 둔감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스스로 위대하다고 느끼는 심리유형”이라고 정의합니다. 피노체트가 생각납니다. 나만큼 칠레를 사랑한 칠레인은 없어, 그는 그렇게 소리쳤을 겁니다. 그는 칠레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그만큼 칠레 국민을 괴롭혔으니까요…

파나마 운하가 뚫리기 전 대서양을 건너는 배는 아바나, 리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나 마젤란 해협을 건너 푼타아레나스를 지나고 다시 훔볼트 해류를 따라 올라옵니다. 발파라이소는 태평양을 건너 일본이나 중국, 더 멀리는 인도로 향하는 대항해에 앞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보급품을 채우는 거점 항구로서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칠레 현대사에선 쿠데타 군의 거점 도시였으며 현재에도 칠레 해군성이 있는 칠레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입니다. 산티아고는 안데스 산자락 아래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발파라이소는 산티아고의 입이기도 합니다.

발파라이소로 달려가는 길엔 포도농장이 끝도 없이 펼쳐집니다. 푸른 들판에 어울리는 칠레 음악이 듣고 싶다고 운전사에게 말을 건네니 운전사는 아는 가수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빅토르 하라(Victor Jara)의 곡을 들려달라고 말하고 운전사는 뒤돌아보며 싱긋 웃습니다. 칠레 사람들에게 빅토르 하라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김남희 씨는 남미 여행기에서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슬로건으로 ‘누에바 깐 시온(새로운 노래)’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가수 빅토르 하라. 칠레가 사랑했던 그는 5천여 군중이 지켜보는 운동장에서 개머리판으로 손목이 으스러지고 총살당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쿠데타 군은 1,800명의 정치범을 공개 총살했다고 합니다. 비공개된 인원까지 취합하면 4,000여 명이 살해되었다지만 공개적으로 가수의 손을 개머리판으로 으깼다면 두고두고 대중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 그를 잊지 못하게 하고 사랑으로 보답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운전사는 그의 이름만 듣고도 저를 사랑하는 거 같아 보입니다.

그가 했다는 새로운 노래운동은 왜 쿠데타 세력의 미움을 받았을까요.. 새로운 노래운동인 일명 ‘누에바 깐 시온(Nueva Cancion)’은 정치적인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안데스 지역의 전통 민속 음악을 발굴하고, 발전시켜서 제국주의의 문화 침략에 저항하고 맞서 싸운 노래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선구자는 아르헨티나의 음유시인 아타우알파 유빤끼(Atahualpa Yupanqui)인데, 그는 1940년대부터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유빤끼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를 담은 노래를 부르면서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상업적 노래나 정치적 선동 가요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서민의 입장을 이해하고 남미의 전통을 찾는 과정은 다분히 지배질서에 대한 반성과 부정을 동반하게 되고 정치적 성향을 띤 운동으로 발전해 가게 됩니다. 예술의 에너지가 저항의식이고, 창작의 시작이 저항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누에바 깐시온’ 극히 예술적 과정일 뿐입니다. 순수한 예술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누에바 깐시온은 칠레에서 어떻게 발전했기에 칠레인들의 마음속 빛으로 남겨져 있을까요?

여성 음악가인 비올레타 빠라(Violeta Parra)는 안데스에 산재한 민속 음악을 수집하여 상업성에 오염된 대중음악에 대항하고,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녀는 유빤끼에서 시작된 누에바 깐시온을 민중을 위한 노래로 발전시킨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이며 저항의 상징적 존재가 됩니다. 그녀는 “죽음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라는 평소의 신념대로 1967년에 권총 자살합니다. 그녀의 저항의식과 극적인 삶은 많은 예술가를 자극했는데, 빅토르 하라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빅토르 하라의 새로운 노래운동은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절정기를 맞습니다. 그리고 아옌데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그도 예술가가 아닌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고 외치며 기타를 쳤고 그의 기타는 혁명 에너지를 퍼트렸습니다. 군부는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해서 음반을 전부 수거해 소각했고, 그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현재 그의 노래를 담은 유일한 음반인 ‘선언’은 영국인 아내인 조안 하라(Joan Jara)가 은밀히 국외로 반출해 1974년에 제작한 것으로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음반이라고 합니다.

운전사는 빅토르 하라의 음악을 틀었고, 저는 그의 노래를 처음 듣기에 가만히 듣고 듣습니다. 다음 노래가 시작되려는데, 운전사는 러시아의 ‘빅토르 초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를 아느냐고 말을 건네며 버튼을 눌러 몇 곡을 건너뛰고, 라디오에선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저음의 러시아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드넓은 대지에서 피어나는 묵직하면서도 깊게 퍼지는 리듬, 가슴을 긁으며 쓰리게 아픔을 남기는 음색, 빅토르 초이는 저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제가 소련 연방을 여행했던 1992년 12월, 그는 이미 죽은 몸이었고 저는 그의 벽화 앞에서 한참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를 몰랐고 벽화 옆에서 들려오던 가슴을 후벼 파던 음악에 진저리를 쳐야 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혁명의 나라 러시아, 혁명을 겪은 나라 칠레, 변화를 갈구하던 두 청년은 노래로 세상에 이야기한 듯합니다.

“우리의 가슴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눈은 변화를 요구한다.” -빅토르 초이의 노래, 「변화」

칠레는 음악보다는 문학에서 예술의 열정이 끓어오르는 나라입니다. 예술의 혼은 군부독재의 탄압에서도 성숙을 멈추지 않았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파블로 네루다를 낳았습니다. 남미에 5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2명이 칠레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안네는 칠레의 예술혼은 진행 중이며 우리가 향하는 발파라이소는 그런 도시라고 말합니다.

대항해시대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더불어 칠레의 현대사에서 잊지 못할 장소인 발파라이소. 아옌데는 발파라이소의 빈민촌에서 성장합니다. 그가 의사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꿈꾸며 정치가의 길을 선택한 데는 발파라이소가 준 숭고한 에너지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발파라이소에서 시인의 삶을 살며 인생의 최전성기를 맞습니다. 그리고 아옌데의 죽음을 알고 조용히 눈을 감은 곳도 발파라이소입니다. 피노체트의 쿠데타 군이 제일 먼저 점령한 곳도 발파라이소이며 그들은 산티아고로 밀고 올라가 쿠데타에 성공합니다. 세 명의 남자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만난 곳, 한 명은 의사이자 정치가로, 한 명은 외교관이자 시인으로, 한 명은 군인이자 독재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곳입니다.

발파라이소를 찾는 여행객은 파블로 네루다의 집을 찾아보고 유네스코에 지정된 도시의 뒷골목을 둘러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저도 그런 여정을 따라가려 발파라이소에 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큰불이 나서 뒷골목의 벽화가 많이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안네는 네루다의 집이 뒷골목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네루다의 집을 우선 방문하고 전망대로 가서 점심을 먹은 후 힘을 내서 뒷골목을 돌아보자고 경로를 짜줍니다.

점심은 예약해야 한다며 빠일라 마리나(Paila Marina)를 추천해 줍니다. 빠일라 마리나는 여러 종류의 조개와 오징어, 생선을 뚝배기에 넣고 끓인 해물탕인데, $10 정도로 가격도 적당하고 맛이나 양이 여태껏 맛본 칠레 음식 중 최고였습니다. 신기한 건 우리나라의 뚝배기가 칠레에서도 인기라는 점입니다. 음식을 예약하고 네루다 파블로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노벨 문학상을 탄 남미를 대표하는 시인이면서도 ‘사랑의 시인’,‘자연의 시인’,‘민중시인’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그는 정치색이 뚜렷하고 순수문학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노벨상 후보에서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네루다의 다양한 작품 활동과 뛰어난 작품성을 노벨 위원회도 외면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삶이 바로 시이고, 그의 시가 바로 삶이란 걸 알게 됩니다. 외로움과 상처 그리고 자각에서 문학적 에너지를 찾은 네루다의 시는 단단하고 정직했는데, 그건 그의 삶 자체가 시의 에너지 공급원이기 때문입니다.

네루다의 초기 작품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시인으로 명성을 얻은 네루다는 미얀마, 스리랑카, 자바, 싱가포르에서 외교관 생활을 자원했는데, 본국의 지원이 없는 명예영사 신분이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궁핍했습니다. 더군다나 외로움을 달래려고 결혼한 네덜란드계 아내는 스페인어를 전혀 몰랐기에 깊은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이러한 깊은 고독은 빈곤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식민지 대중들의 비참한 삶과 인간적 관계를 깊이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 후 네루다는 스페인 주재 영사로 근무하면서 스페인 내전을 겪습니다. 양심과 힘이 맞서는 격렬한 전쟁의 광기를 목격하고 네루다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현실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는 프랑코 군에 쫓기는 시민 군을 숨겨주고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해외 탈출을 도와주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하다 프랑코에 의해 추방되기에 이릅니다. 혼자일 수밖에 없는 해외 생활의 외로움, 영사 신분이나 곤궁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상처, 그리고 스페인 내전을 통해 자각한 양심과 정의가 무력에 의해 짓밟히는 힘의 논리를 보며 그의 섬세한 감성은 세상을 빨아들였고 그는 민중시인으로 거듭납니다. 네루다는 시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한계에 다다르자 현실 정치에 뛰어들고 총을 들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시라는 무기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에겐 시만으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해, 좌파연합이 선거에 임하는 1970년, 공산당 후보로 추대되었음에도 단일후보를 이루기 위해 아옌데에게 후보를 양보하고 정치계를 떠나 시인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가 시인의 자리로 돌아와 안주한 곳이 바다가 마주한 발파라이소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자리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비가 오는 새벽에 의사는 네루다의 집을 두드립니다. 의사는 시인의 건강이 걱정이니 라디오를 일체 켜지 말라고 단단히 부인에게 당부합니다. 시인은 아옌데가 죽은 것에 대한 사정을 모르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요란한 대민 방송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아옌데의 죽음을 감지한 시인은 라디오를 켜게 하고 조용히 운명의 시간에 몸을 맡깁니다. 그렇게 자리에 누운 시인은 다신 일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세 남자가 끌고 간 칠레의 현대사, 산티아고와 발파라이소는 동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 세 남자의 이야기가 꽃피운 땅이었습니다.

SANTIAGO 1
발파라이소의 파블로 네루다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