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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 탱고의 도시

멋과 낭만의 도시라고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그 중심광장에는 떼아뜨로 콜론(Teatro Colon)이라 불리는 오페라하우스가 있습니다.

세계 3대 극장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웅장하고 양식이 고풍스럽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중심 로터리에 오벨리스크(Obelisk)가 서 있습니다. 룩소르에서 가져온 건 아닌 것 같고요, 모조품인 게 티 날 정도로 세월의 때가 묻어있지 않습니다.

세계 3대 오페라극장을 가진 예술도시, 세상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오벨리스크로 도시의 위세를 세우는 도시, 워싱턴, 파리, 이스탄불, 로마같이 시대의 주인이었던 도시만이 오벨리스크를 상징으로 세워두었는데, 부에노스도 세상의 중심이고자 꿈을 꾼 도시인가 봅니다. ‘레꼴레따 공동묘지(Cementerio de la Recoleta)’를 방문해 에비타(Evita,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의 가족묘를 찾아가 봅니다. 아무런 인연도 없지만, 사랑을 갈구한 여성이기에 저의 사랑이나마 주려는 마음입니다.

로타리에 서있는 오벨리스크

공동묘지를 나와 오페라 극장을 서점으로 바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을 방문해 서점이 화려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서점은 하나 둘 문을 닫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지식과 정보가 요약되어 있고,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손쉬워진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수단은 이제 책이 아닙니다.

서점이 역사의 뒤안길에 접어든 건 세상의 진보와 연관된 흐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걸 돌려보겠다고 애쓰는 부에노스인가요… 부에노스는 시간 보고 좀 머무르라고 말하는 모양입니다. 부에노스는 어떤 도시이길래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 오벨리스크를 존중하며 사라지려는 서점을 부둥켜안고 있을까요… 모라토리엄(Moratorium)에 직면해서도 탱고를 멈추지 않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사는 도시, 부에노스엔 현대의 가치로 논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있지 않을까요? 이해의 단초를 찾아 탱고의 발생지, 보카 지구(La Boca)를 찾아갑니다. 보카 지구는 라플라타 강(Rio de la Plata) 하류의 항구도시로, 식민 시대부터 주요 교역항이었습니다.

스페인 왕실은 남아메리카에 4개의 부왕령을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라 플라타 부왕령일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잉카의 땅에 세워진 페루 부왕령이나 아즈텍의 영역에 세워진 베라크루즈 부왕령, 중미와 남미를 연결하는 길목이면서 마야의 터전에 자리 잡은 그라나다 부왕령은 모두 밀집된 인구와 문명도시가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 세워졌으니 부왕령이 들어설 이유로 충분합니다.

라 플라타 부왕령은 어떤가요? 정글을 개간해서 만든 항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내륙에서 재배되는 생산물을 스페인으로 가져가는 데 꼭 필요한 항구였기 때문에 스페인과 식민지 간 교역규모가 늘어날수록 라 플라타 부왕령은 확대되고,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태가 됩니다.

스페인 왕실은 남아메리카의 무역을 스페인 본국으로만 한정했으며 그 항구도 아바나(쿠바), 베라크루즈(멕시코), 라 플라타(아르헨티나) 세 항구로 제한합니다. 보카 지구의 영광은 그렇듯 라 플라타의 성장과 함께 꽃피워갑니다. 보카 지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진입 항구로 서울과 인천 같은 관계입니다. 부에노스에서 차량으로 40분 떨어져 있어서 거리도 비슷합니다.

서점이 된 오페라, 엘 아테네오 서점

보카 지구의 첫 방문지는 부두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재현한 ‘까미니또 (Caminito)’ 거리입니다.

양철 건물에 파스텔 톤의 색을 입혔지만 좁은 양철 건물은 여러 가구가 다닥다닥 모여 산 고달픈 삶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독립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통치하는 것은 사람을 이주케 하는 것이다.” 라고 외칠 정도로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아들입니다. 남아메리카가 독립하고 100년 동안 유럽에서 이주해온 인구는 1,500만에 달하는데, 그중 600만의 이민자를 아르헨티나가 받아들였으니 절반에 가까운 수이고 이런 인구증가를 토대로 아르헨티나의 성장은 시작됩니다. 그런데 신대륙에 이주해온 사람들은 일을 찾아오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남자들이 모여들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자라고는 찾기 보기 어려운 극심한 남초(男超)의 도시가 됩니다. 고된 일을 마친 부두의 노동자들은 여자를 찾아 사창가로 향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여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환심을 사야 했으니 노동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수컷의 능력을 발휘했는데, 그게 탱고의 시작입니다. 당시 여자는 남자의 200 : 1의 비율이었다고 하니 수컷들의 경쟁은 아주 치열했을 겁니다. 그래서 탱고에는 외설적인 동작이 스며듭니다. 다시 말해 선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짧은 시간에 여자의 몸을 최대한 많이 더듬으려는 수컷의 욕정이 베여 있습니다.

탱고의 동작을 보면 춤추는 척 껴안기 위해 거칠고 빠르게 다가가고, 몸과 얼굴을 붙이고 이동하는 연속 동작과 여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회전과 눕히는 동작이 절도 있게 이어집니다. 현재는 예술로 승화되어 손의 위치가 가지런하지만, 당시엔 동작을 구사하며 여성의 몸을 더듬었을 수컷들의 놀이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탱고에는 ‘몸으로 쓰는 시(詩), 춤추는 슬픈 감정, 춤의 종착지’라는 예술적 평가만큼이나 “광대뼈를 맞대고 춘다.”라는 여러 익살스러운 표현이 따릅니다.

BUENOS AIRES
몸으로 쓰는 시, 탱고

 저는 탱고 쇼를 보기 위해 두 가지 선택에 갈팡질팡했습니다. 까미니또 거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탱고 쇼 전단을 건넵니다. 전단마다 극장이 다르니 무엇이 좋은지 고민스럽기만 합니다.

안내하는 로사(Rosa)는 관광객을 위한 대형극장을 권합니다. 대형극장은 나오는 출연자의 예술성이 높고 시설이 좋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그 외 선택은 없는 건가요?

점심을 먹는 식당에서도 탱고는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분명 이들은 거리의 삼류 예술가들이고 대형극장엔 일류 예술가들일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탱고를 광대뼈를 맞대는 춤이라고 하는데, 관람만 한다면 탱고의 본질이 아닌 듯합니다.

오래전 본 영화를 떠올리며 저는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영화 [해피투게더]의 촬영 장소였다는 ‘바 수르(Bar Sur)’를 찾아 예약전화를 합니다. 오늘 네 쌍의 프랑스 부부가 있어 예약되어 있다며 몇 명이냐고 묻습니다. 둘이라고 대답하니 운이 좋다고 하네요. 남은 테이블은 하나뿐이라니 10명이 최대 수용인 듯합니다.

작은 원탁에 앉아 숨소리를 느낄 만큼 가까이서 탱고를 관람합니다. 동작과 선율의 흐름을 느낄 수 있고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게 소극장의 맛이죠… 프랑스 부부는 댄서의 요청에 신을 갈아 신습니다. 탱고 신발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대로 신나게 춥니다. 뻘쭘히 있는 저에게도 춤을 추자고 손을 내미는데, 생전 춤을 배워봤어야지요.. 더군다나 신발과 복장도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습니다.

관람하는 극장으로 갈지, 한판 어우러지게 노는 작은 바에 갈지 결정하는 건 결국 저의 선택인데, 저는 선택에 따른 아무런 준비도 없었으니 분명 결례인 듯합니다. 여행자라고 해서 결례가 미화되지는 않죠… 저는 일어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서야 앉았습니다.

까미니또거리의 입구
양철건물로 이루어진 까미니또 거리

 “로사가 생각하는 아르헨티나의 자랑을 5개 꼽는다면?”

저의 질문에 로사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나씩 선정합니다.

“탱고의 열정, 파타고니아의 자연, 팜파의 풍요, 이과수 폭포, 그리고 교황에 대한 자부심.”

그녀가 꼽은 다섯 가지를 하나씩 되짚어 보니 팜마와 파타고니아는 이미 지나왔고 탱고를 접해봤으니 이과수만 남은 셈입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이번 여행에서 뵙기가 어렵겠네요… 프란시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의 자랑인 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식민지에 가톨릭을 이식하고 처음으로 탄생한 교황이기도 하고 스페인 왕실에 대항하다 아메리카 대륙과 스페인에서 쫓겨난 예수회 소속이라서 더더군다나 의미가 있습니다.

영화 [미션]에서 알타미라노 주교는 과라니족 공동체를 지키던 신부들이 모두 죽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기도실로 들어가 신께 고백합니다.“신부들은 죽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자는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미션의 마지막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듯한 대사로 끝납니다. 산 자는 누구인가요? 예수회이고 아메리카의 가톨릭인가요? 서구에서 가톨릭이 저물어가는 동안 아메리카에서 가톨릭은 성장했습니다. 그러니 알타미라노 주교의 고백대로 부정은 정의 앞에 무릎 꿇게 되기 마련인가 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톨릭의 성장은 신의 축복이며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잉카와 아즈텍이 놓아버린 케틀코아틀과 비라코차를 가톨릭의 신이 대신했고 새로이 이민 온 사람들,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 모두 가톨릭의 신을 모시면서 공동의 의식세계를 이룩합니다. 신이 아메리카를 유럽에 선물한 이유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멋진 답이 될 거 같습니다. 신이 아메리카를 유럽에 선물하기 전 유럽은 어땠을까요…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에서 저자인 ‘김상근’님은 “14세기부터 강화된 르네상스의 태동은 피렌체 시민이 기독교 신앙에 더 가까이 근접해감으로써 촉발된 측면이 있다.” 라고 기술합니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중반 피렌체의 시민은 3/4이 사망하는 절망에 빠집니다. 죽음에 무기력했던 피렌체 시민은 신에게 한 발 더 다가갔고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교회와 신에게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피렌체 시민들은 한발 다가선 만큼 교회로부터 한 발 더 멀어지게 됩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며 주어진 시간이라도 인간답게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싹트면서 삶에 대한 탐미적 성향이 강해집니다. 15세기는 흑사병으로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바닥까지 실추된 체 시작됩니다. ‘김상근’님은 “15세기 르네상스는 인류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어땠을까요… 교황의 권위가 약해지며 로마, 아바뇽, 피사에서 교황이 나와 자신이 정통 교황이라고 대립하는 ‘교회의 대분열 맞습니다. 겨우 정리되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어 유럽 사회를 이끌어가는 자리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이제 유럽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은 발전의 도그마가 주는 자신감입니다. 그 자신감으로 대양을 넘어 아메리카로, 아프리카로, 아시아로 뻗쳐갔습니다. 그들은 민낯을 감추기 위해 가톨릭의 가면은 썼었을 뿐, 가톨릭의 정신에 전혀 제어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었고, 가톨릭은 그런 인간을 포장하는 장식으로서 충실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아메리카 여행을 하면서 그들을 하나씩 만나갔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찰스 다윈(Charles Darwin),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 아메리카는 그들이 올린 운명의 닻에 끌려가기 시작합니다.

 아메리카로 향하는 교회도 목적이 뚜렷합니다. 유럽에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 아메리카 교회에 열의를 다합니다.

유럽은 필요에 의해 몰려들었건만 아메리카는 가톨릭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500년이 지난 현재 가톨릭 신자 수, 가톨릭의 영향력 모두 세계 최고입니다. 거기에 더해 교황까지 배출했으니 남미야말로 가톨릭의 맹주요 신의 성스러운 대지로 태어난 것입니다.

프란시스코 교황은 새로운 시대에 교황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로사리오 카렐로’가 지은 [안녕하세요, 교황입니다]는 교황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기록한 책인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교황은 바티칸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을 보고 앉으라고 말을 건넸으나 전통이라며 거부하자 여기서는 내가 명령자라며 병사를 쉬게 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다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의 대리자로서의 권위보다 인간적 따뜻함이 엿보이는 모습입니다, 반면 오바마 미 대통령(Barack Obama)과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쿠바 국가 평의회 의장에게 친서를 보내 두 나라는 대립을 종식시키는 대화를 시작하라고 권유를 했으며 교황의 권유에 따라 양국은 대화를 시작했고 54년 만에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습니다. 인간성과 리더십을 갖춘 교황의 모습은 과거 어느 교황도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어서 고개 숙이게 됩니다. 결국, 신의 권위를 되살리는 건 신의 몫이 아닌 인간의 몫인 거죠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메리카에 가톨릭의 꽃을 활짝 피운 듯합니다.

아르헨티나의 자랑거리 중 하나 이과수 폭포(Iguazu Falls)가 남았으니 시간을 재촉해 이과수 폭포로 날아갑니다.

이과수는 북미의 나이아가라 폭포,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에 꼽히지만, 그 이상입니다.

나이아가라와 빅토리아 폭포를 합해도 이과수에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물줄기와 엄청난 수량을 보면 아마존이 아니고서는 어림도 없을 거 같은데, 이과수의 수원은 아마존이 아닌 브라질 남부 파라나주의 쿠리치바(Curitiba)에서 발원합니다.

쿠리치바는 브라질 남부일 뿐 아니라 해안가 부근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아마존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데 이과수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걸 보면 1,800만 년 안데스가 융기하기 전 동쪽이 훨씬 높은 지역이었다는 설명이 이해가 갑니다.

이과수강은 이과수 폭포를 지나 북에서 흘러내려 온 과라니 강과 만납니다. 과라니 강도 신원을 추적해가면 브라질 중부의 동남쪽 해안 고지대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며 파라과이 국경을 따라 흐릅니다. 그리고 이과수 폭포를 막 빠져나온 물줄기와 만나 남으로 흘러내립니다. 강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현자이니 안데스의 영향을 받았겠죠… 그렇게 파라과이를 감싸면서 남쪽으로 흐르던 강은 아르헨티나로 흘러들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갑니다. 이 강 하구가 스페인 시대 주요 교역항이었던 라 플라타강 하구입니다.

라플라타 강은 현재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국경을 긋는 큰 강이며 여전히 내륙으로 연결하는 대표적인 교통로이기도 합니다.

파라과이는 내륙국이어서 바다로 나가려면 과라니 강에서 출발하여 라 플라타 강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이용해야만 했고, 산업이 발달하고 교역이 커가면서 항구의 확보는 국가의 운명같이 중요한 사안이 됩니다. 그래서 라 플라타 강을 국경으로 삼고 있는 우루과이 내정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사건의 시발은 1864년 우루과이의 농민들 때문에 브라질 가우쵸(목동)이 피해를 입었다면 이를 배상하라는 사절단을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보내면서 시작됩니다. 구글 지도를 확대하여 브라질과 우루과이와 국경을 보면 상식에 부합되는 면이 전혀 없습니다. 강도 산맥도 아니 들판에 나무를 몇 줄 심어 놓은 게 국경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김 씨네 땅과 박 씨네 땅을 임의로 갈라놓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누구는 파라과이를 누구는 브라질을 지지하면서 그 가문의 땅이 그대로 국경이 된 거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갈등과 충돌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소 떼가 자유자재로 오갔을 테고, 국경을 넘어와 농작물을 망가뜨린 일이 다반사였을 겁니다. 농부는 그런 소를 그냥 놔두지 않죠, 죽이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했을 겁니다. 목축인과 농업민과의 갈등은 역사의 교훈으로 남은 예가 많습니다. 최근의 사건으로,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인종학살도 목축을 하는 투지와 농업에 종사하는 후투족과의 갈등이 시작이고 이면에는 목축을 하던 투치족이 커피 농사를 시작하며 정착을 했고 커피값이 폭락했을 때, 서로를 증오하게 된 깊은 이해관계가 발단입니다. 그런 일이 브라질과 우루과이 사이에서도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파라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앞선 공업 강국이었습니다. 우루과이는 파라과이를 믿고 브라질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브라질은 군대를 출병시키지요. 우루과이는 파라과이를 막아주리라 생각했는데, 파라과이가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우루과이에는 브라질 정부가 들어섭니다. 그리고 곧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삼국동맹이 맺어집니다.

파라과이를 상대로 세 나라가 뭉친 것입니다. 이 전쟁을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 중 가장 추악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전쟁의 결과가 참혹하기 때문입니다. 전쟁 전 파라과이의 인구는 525,000명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1871년에 이루어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221,079명이고 그중 여성이 106,254명인데 반해 남성은 28,746명, 유아와 노인이 86,079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수치로 보면 90%의 성인 남성이 사라진 전쟁이었습니다. 남자끼리 하는 전쟁이지만 남자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무장한 남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이한 전쟁이었습니다.

파라과이는 강한 보호무역 정책을 시행하여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보호무역을 하면 불편한 나라들이 있습니다. 원료를 사가야 하는 나라와 물건을 팔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남아메리카는 독립하였고 신생 독립국은 스페인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유리하게 무역을 사구와 무역을 시작합니다. 남아메리카와 서구 유럽은 서로의 발전을 견인하는 좋은 동반자가 됩니다. 그런데 파라과이의 보호무역이 성공적으로 발전해가면 유럽은 스페인이 통치하던 때와 같이 비싼 값에 원료를 사야 하고 높은 관세 때문에 수출에 피해를 보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스페인은 통치하던 시대 남아메리카는 스페인하고만 무역이 허용되었고 서유럽 국가들은 스페인으로부터 원료를 구입해야 했습니다. 스페인은 싼값에 가져와 비싼 값에 팔며 국고를 늘렸습니다. 유럽이 부당한 거래에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겠죠…

스페인 왕실은 남아메리카 식민지 정부는 스페인 본국하고만 무역을 하도록 법으로 정했지만, 스페인과 남아메리카 무역량은 전체 무역량의 5%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물류혁명을 이끈 네덜란드가 30%, 프랑스 25% 제노바 20%를 찾아 할 만큼 밀무역이 훨씬 성행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남아메리카는 독립을 하게 됩니다. 스페인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데는 특유의 도덕 불감증도 있고 놀기 좋아하는 기질도 있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이 가장 큽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점령하고는 사촌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세웠고 식민정부는 페르난도 7세를 지지했으므로 그때부터 본국과의 대립과 분리는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에서 실패하고 돌아와 실각하고 페르난도 7세는 다시 왕이 되었지만, 식민지는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본국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다시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정권을 잡고 영국과 한 판을 준비합니다. 스페인 왕실은 나폴레옹 덕 좀 보려 했지만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는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패하여 대부분의 함선을 잃게 됩니다. 이제 스페인은 대서양 건너 식민지에 군대를 보낼 여력도 없고 군대를 실어 나를 함선도 없습니다. 그때쯤 독립의 구체적인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태어난 나라가 파라과이고 아르헨티나며 브라질, 우루과이입니다. 넓은 땅에 사람 몇명 살지도 않고, 국경이랄 것도 없이 점유하고 있는 대로 그어진 선에 불과한 땅에서 시간이 갈수록 갈등이 커진 단순한 분쟁일 뿐입니다. 그런 사소한 분쟁이 인구의 50%, 남자의 90%를 죽이는 대 살육으로 끝났으니 필요에 의한 전쟁이랄 수밖에요… 무슨 필요였을까요… 역사를 되돌려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게 역사가의 일이니 몇 가지 견해를 견주어 보고자 합니다.

다른 견해는 국가를 마치 집안 사업같이 운영하던 로페즈 가문이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무리하게 브라질과 전쟁을 벌인 때문이라는 견해입니다. 보호무역도 가문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로페즈 정권은 망하는 게 더 나은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죽어야 하는 상황은 피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중심에 로페즈가 있다고 말합니다. 로페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동맹군과의 평화를 맺으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삼국 간에 맺은 조약은 정전이나 평화가 아닌 파라과이 로페즈의 죽음과 현 정권의 몰락만이 전쟁의 종료를 나타낸다고 한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쟁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이런 내용을 안 로페즈 역시 과격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로페스는 항복에 관한 얘기를 하는 군사와 관료는 다 죽이도록 명령했고, 파라과이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최후까지 싸워야 했습니다. 로페즈 역시도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조국과 같이 죽겠다.’고 외치며 칼을 놓지 않았으니 항복할 수도 없고 죽어야 끝나는 정말로 악독한 전쟁이었습니다. 이과수로 향하는 비행기는 삼국 전쟁 결과 아르헨티나령이 된 이과수 공항에 내립니다. 차를 타고 호텔로 가기 전에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의 국경을 볼 수 있는 공원(Hito Tres Fronteras)에 잠시 내립니다. 가이드는 손으로 강 건너를 가리킵니다. 이 강이 과라니 강이고 저 건너편이 파라과이라고 합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건만 파라과이엔 불빛 하나 없이 어둡기만 합니다. 강 건너는 아직도 어둠과 고통 속에 있나요… 아니면 개발되지 않은 정글인가요…

아르헨티나의 자랑거리인 이과수폭포

 ‘이과수’는 원주민 과라니 족 언어로 ‘거대한 물’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바이칼 주변의 몽골 부족은 호수를 보고 ‘바이갈’ 즉 ‘큰물 불렀습니다.

티베트의 유목민은 물이 가득 들어찬 늪지를 해자(海子)라고 부릅니다.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큰물은 상상의 바다입니다. 모든 사물을 품기도 하고 삼키기도 하는 바다는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도 그런 마음이 이어집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여사는 이과수를 만나고 “불쌍한 나이아가라!”라고 탄식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의 자존심도 꼬리 내리게 한 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과수의 너비는 대략 4.5km, 폭포의 수가 275개, 규모로 보면 나이아가라, 빅토리아와 비교되지 않습니다.

이과수는 아르헨티나가 80%를, 브라질이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쪽에서 한번 브라질 쪽에서 한번 이과수를 만나게 됩니다.

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는 폭포의 상단까지 다리가 놓여있습니다. 다리를 따라 걸어 낙차가 시작되는 지점에 다다르면 작은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어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전망대를 나와서는 상류 순환코스(Circuito Superior)로 불리는 길을 따라가며 폭포를 조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이라이트는 ‘악마의 목구멍(La Garganta del Diablo)’으로 불리는 폭포를 조망하는 것과 산마르틴섬 옆의 폭포 밑으로 접근하는 보트 여행입니다. 보트는 쏟아지는 폭포 아래에서 머뭇거리고 하늘에서 뿌리는 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젖습니다. 그래서 나누어주는 방수 팩에 귀중품과 갈아입을 옷을 잘 넣어두어야 합니다. 물을 맞는 게 즐거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 나옵니다. 80일간의 아메리카 여행이 끝나가는 날, 그동안 몸 안에 쌓인 갈등이 씻겨나가는 기분입니다. 탐욕과 야만이 물러나고 신성과 희망이 자라나는 땅에서 좌고우면(左顧右眄) 하면 찾고 또 찾았던 80일간, 찾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거 같습니다.

브라질 측 이과수에 가려면 국경을 넘어야 합니다. 여행객이 많아서인지 여권만으로 간단히 통과됩니다. 브라질 이과수는 전체를 조망하기 좋은 자리입니다. 차에서 내려 긴 조망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이과수는 은은하고 찬찬히 동행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밋밋하기만 하다면 손님을 못 끌어서 그런가요, 다이나믹한 마무리를 감추어 두었습니다. 폭포 아래로 긴 회랑을 만들어 폭포 정면까지 다가갈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튀어 오르는 물보라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얼굴을 때려대는 물보라가 편안한 마사지 같습니다. 조망로의 끝은 폭포 중단에 만들어져 뛰어내리는 물줄기의 힘찬 육질을 감상하게 해줍니다. 몸 안의 근육이 이렇겠죠… 단단히 필요한 방향으로 힘을 내뿜는 역동성이 단련된 근육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