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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잉카의 소리를 듣다

잉카는 티티카카 주변에서 시작한 작은 부족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건국 신화는 마치 선택받은 민족인 듯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역사적 성공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한낱 옛날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잉카는 역사적인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들의 건국 신화는 남미의 탄생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태양의 신 ‘인띠’는 티티카카에서 ‘망꼬’와 ‘오꼴로’를 창조합니다. 그들은 형제이면서 부부가 되었고 잉카족을 번창시켰으니 잉카에서는 친누이나 사촌 간에 배우자를 찾는 전통이 됩니다. 잉카족의 왕국을 건설하라는 인띠의 명을 받은 망꼬와 오꼴로는 지하의 길을 따라 쿠스코에 이르렀고 그곳에 첫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이름하여 ‘네 개의 땅이 합쳐진 땅’ 타완틴수유의 시작입니다.

잉카는 왕을 의미하는 명칭이고 잉카인들의 나라는 케추아(Quechua)어인 타완틴수유입니다. 친차이-수유(북쪽 땅), 안티-수유(동쪽 땅), 쿠야-수유(남쪽 땅), 쿤티-수유(서쪽 땅)를 합친 땅, 다시 말해 사방위를 포괄하니 모든 대지의 주인으로서 자신을 상징합니다.

잉카는 처음부터 제국을 꿈꾸었던 모양입니다. 스페인의 어느 사가는 잉카의 귀족 여럿에게 잉카 제국이 그렇게 넓은 지역으로 팽창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잉카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잉카가 땅을 넓히는 것은 질서가 무너져 혼란스러운 세계를 다시 안정시키고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속내가 무엇이든 명분은 신을 받드는 올바른 나라의 확립입니다. 혁명도 역성혁명도 모두 가치를 내걸었는데 근처에 백성과 천심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잉카만이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정복자의 논리입니다. 남미 대륙으로 향하는 스페인의 정의를 이사벨 여왕은 심지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구원할 인디언이 1명밖에 없더라도 우린 정복에 나서야 한다.”

무리해 보이지만 당시의 사고로는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한 명을 위해 제국의 파괴는 물론, 대량 학살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한 명은 신의 아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져야 하는 존재이니까요. 잉카 제국의 확대와 정복도 같은 논리였고 해체 역시 같은 논리로 진행되니 자업자득입니다. 그저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일 뿐…

잉카 왕국은 1,300년경에야 건국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300년경은 구대륙에서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휘젓고 다니던 때이고 한반도에서도 고려의 기운이 기울고 조선의 기운이 상승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때 겨우 작은 부족 단위의 왕국을 세웠으니 잉카의 시작은 건국 신화와 달리 많이 늦고 누추합니다.

잉카는 100년이 지난 1,400년대에 이르러 성장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8대 잉카인 비라코차는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며 잉카의 확장을 꾀합니다. 당시 잉카는 고구려의 5부족 회의와 같이 부족회의의 수장일 뿐 절대적인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권력이 분산되다 보니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비라코차의 정벌은 주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정복을 통해 확보된 재물로 귀족을 회유하고 전쟁을 하기 위해 모인 군사들을 통제하며 권력 기반이 공고해집니다. 곧 이때부터 절대 왕정국가의 초석이 놓이기 시작합니다. 자신만만하던 비라코차 잉카는 당시 안데스 고원을 양분하던 북쪽의 창가족을 공략합니다. 하지만 창가족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역습을 당하며 전세가 역전되고 쿠스코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쿠스코가 위기에 처하자 귀족들은 등을 돌렸고, 비라코차 잉카는 쿠스코가 함락의 위기에 몰리자 장자인 잉쿠르콘만을 데리고 쿠스코를 탈출합니다. 둘째 아들인 유판키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흩어진 병사들과 백성들을 다시 모으고 귀족들을 설득하여 창가족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창가족의 공격을 물리침과 동시에 반격을 하며 창가족 왕국을 멸망시킵니다. 그런 성과를 냈으니 비라코차를 이어 9대 잉카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것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잉카, 전쟁을 통해 권력과 무력을 한 손에 움켜진 진정한 왕의 탄생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임진왜란을 수습하고도 몸을 사려야 했던 광해의 모습이기보다는 자기 세상을 스스로 개척한 이세민이거나 이방원에 가깝습니다. 그가 잉카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실질적인 설계자 ‘파차쿠텍(Pachacútec)’입니다.

1438년에 잉카에 오른 파차쿠텍은 지금의 에콰도르 서부, 티티카카와 페루의 해안까지 땅을 넓힌 정복 군주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습니다. 1463년 파차쿠텍의 아들은 투팍 유판키에게 군권을 물려주고 문명국 건설에 나섰습니다.

제국의 수명이 무기와 재물만으로는 길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 사실입니다. 중국의 힘은 칼이 아닌 붓이었고, 로마의 힘은 배척이 아닌 시민권의 개방이었으며 그리스의 힘은 개방적 도시민의 자유로운 의지였습니다.

파차쿠텍은 잉카가 제국으로 가는 실마리를 자신들이 처음 시작한 티티카카에서 찾습니다. 티티카카를 점령한 파차쿠텍은 티와나코의 현란한 도시 유적을 보고 쿠스코를 이와 같이 개조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때 티티카카의 뛰어난 석공인 코야족이 쿠스코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고 그들에 의해 쿠스코는 제국의 도시로 변모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기억하는 잉카의 상징, 거대 석조 건축물 역시 이때부터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삭사이우아만, 코리칸차, 비라코차 신전, 잉카의 석축, 심지어 오얀따이땀보의 태양의 신전과 마추픽추까지 잉카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이 짧은 시간 동안 마무리되었습니다. 대단한 건축물들이 빈틈없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정복왕의 추진력과 문화 왕의 섬세함이 모두 갖춰졌기에 가능했겠죠.

OLLAYTANTAMPO
'살아있는 잉카의 마을'이라 불리는 오얀따이땀보
MACHU PICCHU
잉카 문명의 고대도시 마추픽추

쿠스코는 파차쿠텍에 의해 4천여 개의 석축 건물과 상하수도의 시설을 갖춘 25만의 도시로 성장합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는 하수 시설을 갖추지 못해 동물과 인간의 배설물이 도로에 넘쳐났고, 도시 곳곳이 악취로 들끓었을 뿐만 아니라 길을 건널 때 번쩍 들어 대신 길을 건네다 주는 직업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19세기 당시 최대의 산업 도시인 런던의 인구는 2만여 명이었고,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스페인의 세비야 인구는 3만여 명이었으니 파차쿠텍은 유럽의 어느 도시도 견줄 수 없는 제국의 심장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잉카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잉카 제국의 멸망 원인에 대해 후대에 사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연두나 홍역 등 남미 대륙에 없는 질병이 원정군과 함께 옮겨져 잉카 전역을 골병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도 꽤나 높은 확률의 이야기입니다.

피사로가 가요의 13인과 함께 무인도에 남은 2차 탐험 당시 그는 둠베스에 원정 기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그가 보고 만난 둠베스는 활기차고 건강했습니다. 4년 후 172명의 원정대를 이끌고 둠베스에 도착했을 때 둠베스는 이미 전염병으로 도시의 규모가 반으로 줄었고 그나마도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황폐해져있던 건 서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키토에 머물던 12대 잉카 와이나까박은 북쪽에 이상한 사람들이 출몰한다는 보고를 받게 됩니다. 그는 새로이 제국에 편입된 땅인 북쪽 지방을 순찰하고 그들이 누군지도 파악할 요량으로 장자인 니난 쿠요치를 대동하고 떠납니다. 그곳이 지금의 콜롬비아입니다.

당시 콜롬비아는 멕시코로부터 서서히 남하하기 시작한 천연두가 확산되어가고 있어서 와이나까박과 그의 장자 역시 천연두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저항력이 없었던 잉카 제국의 황제 부자는 사망에 이렀습니다.

잉카 멸망의 키가 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은 인류가 해방되었지만 천연두는 유럽에서도 맹위를 떨친 가혹한 질병이었습니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천연두는 유럽 인구의 30%를 살해했습니다. 목숨이 다급한 사람들은 신에게 매달렸지만 신은 외면했고, 매달려도 반응이 없는 신을 보며 인류는 가슴에서 신을 뽑아내고 과학을 채워 넣는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습니다.

천연두는 유럽에 진보라는 선물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남미 대륙에서는 무엇을 주었나요, 잉카 제국의 멸망이 남미의 진보라고 보는 견해는 어불성설인 것일까요, 진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남미에서도 변화의 단초였으니 인류와 천연두의 긴밀한 역사 관계는 우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잉카 제국은 와이나까박의 죽음과 함께 급속도로 무너지게 됩니다. 두 아들에게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라는 유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키토를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과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구세력의 갈등으로 발전하고 결국 내전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신구의 대립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의미하기도 하니, 진보와 신흥세력의 구심점인 키토의 승리는 잉카 제국의 새로운 시대 개막, 즉 발전의 전기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잉카 제국은 내전이 종결됨과 동시에 곧바로 멸망 단계에 들어섭니다.

내전을 주시하며 천천히 접근해오는 피사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이겠죠, 만약 쿠스코가 내전에서 승리했다면 제국의 왕이 무기력하게 피사로의 포로가 되지 않았을지 모르고, 피사로에게 제국의 주인 자리를 그리 호락호락하게 내주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다 역사의 순환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꼽는 것이 비라코차(Viracocha)의 전설입니다. 창조주 콘티티 비라코차(Contiti Viracocha)는 ‘세상을 만든 자’로 하늘에서 내려와 불과 비, 농사짓는 방법 등 문명을 전달해 준 민족의 은인이자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악인들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바다 저편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복수를 하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유럽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코리칸차(Qorikancha)의 우상을 기록한 당시 스페인 문헌에는 ‘머리카락, 피부색, 모습, 의복, 샌들 등 그리스도 12 제자의 한 명인 성 바로돌로매와 꼭 닮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즈텍의 목테수마 2세가 코르데가와 그의 무장 병력을 제국의 심장부인 테노치티틀란에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입성시킨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잉카나 아즈텍의 전래에 내려오는 믿음에는 복수의 두려움이 있었고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신성이 있었습니다. 마치 가톨릭에서 말하는 심판의 날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군대와 같습니다. 그리고 코르데가나 피사로가 가져온 대포와 총은 화약이 없었던 아즈텍과 잉카인들에게 불을 뿜는 천상의 무기로 보였을 것입니다. 말린체로부터 아즈텍의 신화를 전해 들은 코르데가는 말을 앞으로 뛰어나가게 함과 동시에 대포를 쏘게 함으로써 마치 하늘의 무기와 같은 이미지로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구사했습니다. 코르데가가 가지고 있던 5문의 대포는 2문 이 외 사용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나마도 적중률이 떨어지는 대포였으나 그의 심리전이 적중했기 때문에 아즈텍은 맥없이 쓰러졌습니다. 그런 현상은 잉카에서도 재현되었고 잉카 제국은 스스로의 두려움으로 천천히 무너져간 것입니다.

 세 번째 원인인 민심이 반도 제국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로마의 영광은 시민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혜택과 자긍심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잉카 제국의 시민도 자긍심이 강했지만 혜택보다는 희생만을 요구하는 종교 의식이 문제였습니다.

태양신을 숭배한 잉카 제국은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이면 태양신을 위해 산 사람의 심장을 재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이 있었습니다.

‘인티라이미(Intiraymi)’라고 하는 태양신 축제가 시작되면 하루에도 몇 십 명의 사람들이 신의 재물로 필요했습니다. 아즈텍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전쟁의 포로를 재물로 삼았지만 전쟁이 없을 때에는 귀족을 제외한 일반 백성 중에서 재물을 뽑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국의 시민은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고 그런 불안감이 제국의 멸망을 방관했던 이유가 될 것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희생을 강요받은 주변 피지배 부족들의 저항도 만만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사로를 따라왔던 사람들은 수치상으로 172명의 비정규군입니다. 스페인의 정복전쟁은 이들이 8만여 명의 제국 정규군과 치른 전쟁입니다. 수치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전쟁이었으면 “그것은 500배나 더 많은 적과 싸워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대승한 기묘한 전투였다.”라고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은 정의를 내렸을까요?

 쿠스코 공항을 나오니 사울이라는 안내자가 저를 맞이합니다. 외우기 쉽죠, 사울입니다. 악센트가 없는 사울에 악센트를 넣으니 서울이 되어 단번에 기억됩니다.

고도가 3,400m이라 공기 저항이 덜 한가요, 몸이 공중으로 둥둥 떠다니는 듯 가볍습니다. 고산 증세에는 코카잎이 좋다며 한줌 건넵니다. 그에게서 코카잎을 받아 입안에 넣고 씹으며 볼리비아 영사관을 방문해 비자를 신청하고 쿠스코 탐방을 시작합니다. 볼리비아 비자를 한국에서 받으면 준비해야 하는 서류도 만만치 않고 대사관을 2차례나 다녀와야 합니다. 그런데 쿠스코에서는 그런 절차 없이 간단한 영사 인터뷰로 비자를 발급해 줍니다. 볼리비아 대사관을 나와 쿠스코 탐방을 시작합니다.

 쿠스코의 유적지는 상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기초석으로 쓴 석축 위에 스페인이 새로운 건물을 얹었기 때문입니다. 코리칸차 뿐만이 아닙니다. 쿠스코를 대표하는 석조 건축물들은 모두 스페인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대성당도 산토도밍고 성당이 코리칸차 위에 지어졌듯이 비라코차 신전을 뜯어내고 여기서 나온 석재로 그 자리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와이나 카팍(Huayna Capac) 궁전 자리에는 콤파냐헤수스 성당, 신녀의 집인 아그사와라 자리에는 산타카탈리나 수녀원이 덧씌워져 있으니 찾지 않고 상상하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사울은 잉카시대 코리칸차의 원래 모습은 사원을 감싸고 있는 석축 위에 2kg 정도의 금판 700개가 축대를 따라가며 하늘을 향해 덮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가 뜨면 빛을 주변으로 반사시켜 마치 빛나는 태양처럼 보였다 설명합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익숙한 스페인 풍의 정원과 회랑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한 면에 가득 채워진 사원 순례가 시작됩니다. 순례는 무지개 사원, 별 사원, 번개 사원으로 이어지고 이곳들을 지나면 태양의 신전으로 맞이합니다.

잉카 시대에는 비라코차를 형상화한 우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 피부색, 모습, 의복, 샌들 등 그리스도 12제자의 한 명인 성 바로돌로매와 꼭 닮았다.’라고 스페인 수도사가 기록한 비라코차를 형상화한 우상입니다. 우상 역시 순금 덩어리여서 아침에 해가 머리에 비추면 마치 등불과 같이 태양의 신전 안을 환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코리칸차에는 금이 아주 많았던 모양입니다. 금판과 금으로 만든 우상 이 외에도 황금 태양판, 뜰에는 황금으로 만든 옥수수, 정원에는 황금으로 만든 꽃으로 치장하고 황금으로 입힌 잉카의 미라, 뜰 중앙의 팔각형 주춧돌마저도 55kg의 순금으로 덮어 있었다고 하니 코리칸차는 황금 사원입니다.

 마지막 잉카 아타왈파는 자신의 몸값으로 자신이 갇힌 가로 7m, 세로 5m, 높이 3m 크기의 방을 금으로 가득 채워주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호언으로 끝내지 않고 잉카의 백성들로 하여금 금을 방안 가득 채우게 하였습니다. 잉카의 백성은 그 많은 금을 모두 코리칸차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챙긴 금은 스페인과 피사로를 잠시 배불렸다가 오래도록 배고프게 만듭니다.

스페인은 금이 유입되면서 강력한 수요의 증가가 일어납니다. 바로 산업혁명입니다. 매달, 누군가가 통장에 1억 원씩 넣어주니 이것저것 사고 싶은 욕구가 증가한 것입니다. 이런 강력한 수요 증가를 자국 내 산업 발전을 통해 해결했다면 세계의 주인은 현재까지 영국도 미국도 아닌 스페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스페인은 수요 증가를 수입으로 해결합니다. 돈이 많은 부자는 현실을 즐겼고 노동과 공해 속에 쓰러져가며 물건을 만들던 공장 주인은 미래를 꿈꿉니다. 흔히 산업혁명을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킨 대혁명에 비유합니다.

일부 귀족들만이 누리던 것을 누구나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소비 시대의 탄생이고, 이를 해결한 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돈이어야 하니 코리칸차에서 가져간 황금이 세상을 바꾼 밀알이 아닌가 합니다.

피사로는 스페인 왕실과 8:2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에 따라 원정대가 챙긴 금은 5,720kg이고, 은의 양은 금의 약 2배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현재로 환산하면 약 1,000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피사로는 다시 172명의 원정 대원들과 계약을 맺었으므로 계약에 의해 금을 나누어주고 피사로가 챙긴 금은 약 200kg, 현재 시세로는 약 40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 외 식민지의 총독이라는 권력까지 얻었으니 하급 귀족 신분인 군인의 서자로 태어난 그로서는 대단히 성공한 인간 승리의 이야기를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코리칸차의 금 때문에 피사로는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와 원정대를 함께 꾸린 알마그로는 분배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을 진압한 피사로는 알마그로를 사형에 처합니다. 알마그로를 추종한 세력은 이에 앙심을 품고 피사로를 암살합니다. 결국 코리칸차의 금은 피사로에게도 스페인에게도 영광 뒤에 숨겨진 독침을 쏘았습니다. 이에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역사학자 로만 자모라(Roman y Zamora)는 “타국의 그 누구보다 사악했던 인간들로 동료들과 함께 에스빠냐 국왕에게 최대의 오명을 남겼다.”라고 평가한 피사로의 동생 후안 피사로는 코리칸차를 자신의 저택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형인 프란시스 피사로의 후광 덕에 쿠스코를 다스리게 된 인물로 더욱 잔인하고 무식한 싸움꾼이자 백정으로 불린 인물입니다. 그가 잉카인의 1차 봉기에 맞서 쿠스코를 지켜냅니다. 그러나 그는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아 전투 중 사망합니다. 그는 죽으며 코리칸차를 허물고 그 위에 산토도밍고 성단을 지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지금의 성당은 그렇게 지어진 것입니다.

코리칸차를 나와 석축을 따라 대성당으로 이동합니다. 이 석축은 잉카의 벽(Calle Inca Roca)으로 불리며 잉카의 높은 석축 기술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1950년대 쿠스코에 지진이 있었는데 스페인 시대에 지은 건물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잉카의 석축은 조금의 변형이 있었을 뿐 온전했다는 설명을 안내자 사울은 귀에 딱지가 앉게 반복합니다. 그 이유를 봐야 한다고 골목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저를 거대한 돌 앞에 세웠습니다. 제가 걸은 골목은 아뚠루미욕(Hatunrumiyoc)이라 불리는 제법 유명한 골목길입니다. 그리고 제가 멈춰 선 돌은 지름 115m의 12각 돌입니다. 면도칼 하나 들어가지 않는 정밀한 석축은 잉카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돌은 사각의 블록이 아닌 적게는 6각, 많게는 18각까지 각을 두어 돌끼리 서로를 맞물리게 합니다. 더욱이 안으로 경사지게 돌을 깎아 지진으로 축대가 흔들리면 뒤로 조금 밀려 다시 자리를 잡고 맞물린 돌끼리 서로 잡아주는 과학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잉카의 석축입니다.

아뚠루미옥을 지나 아르마스 광장에 닿으면 대성당이 우뚝 서 있습니다. 대성당은 비라코차 신전을 부수고 세운 건축물인데 100년간 공들여 지어졌다고 합니다. 대성당은 가톨릭의 신이 잉카의 신을 이겼다는 상징처럼 도도합니다.

피사로는 무슨 확신이 있었기에 잉카와 싸울 생각을 했을까요, 병력의 수로도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규모의 군대를 보고 승리를 확신한 우월감이 궁금해집니다. 피사로는 잉카를 향해 원정을 떠나기 전에 먼저 성공한 코르데가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둘은 8촌 사이입니다. 코르데가는 먼 길을 온 피사로에게 한 수 알려줬습니다.

“왕을 생포해 인질로 삼고 부족 간의 갈등을 부추겨 우군을 만들라.”

1531년 5월 둠베스에 상륙한 피사로는 잉카의 내전 상황을 주시할 뿐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내전에서 승리한 아타왈파는 잉카가 키토를 떠나 쿠스코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 아타왈파의 행로를 파악하고 조용히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해 11월, 북부 안데스의 작은 온천 마을인 ‘까하마르까’까지 추적한 피사로는 아타왈파에게 면담을 청합니다.

잉카와 스페인의 만남을 묘사한 기록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까하마르까 마을 광장에 혼자 기다린 발베르베 신부는 아타왈파에게 레께리미엔또(Requerimiento de Obedienela: 복종 요구서)를 낭독합니다. ‘레께리미엔또는 일종의 복종 요구서로 1514년 후안 로빼스 데 빨라시오스루비오스’가 작성한 문서입니다. 유래를 보면 13세기부터 시작된 국토 회복 전쟁인 가톨릭과 이교도의 종교 전쟁이기 때문에 이교도의 모든 재산과 권리를 합법적으로 취할 수 있다는 사고에서 시작됩니다.

코르데가가 아즈텍 정복을 위해 유카탄반도에 첫 발을 딛기 시작한 1514년에 이미 법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부는 의무를 다 한 것입니다. 레께리미엔또가 남미의 원정대에 의무로 법제화된 것은 카리브에서 자행된 인디오 학살에 대해 ‘가톨릭 종주군을 내세우면서 폭도 같은 행동을 한다’며 유렵 각국이 비난하자 정치적인 부담을 느낀 스페인 왕실이 만든 규약입니다.

레께리미엔토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둘째 교황이 누구이며, 셋 째 가톨릭교도가 이교도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즉 이교도의 주권, 재산권, 사법권을 넘길 것을 요구하고 순응하지 않으면 정당한 전쟁을 치르겠다는 내용을 선언하게 되어있습니다.

발레르베 신부는 레께리미엔토를 읽어주었고 아타왈파 잉카는 생전 처음 듣는 내용에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아타왈파 잉카는 어린애처럼 웃으며 물었습니다.

PLAZA DE ARMAS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예수가 누구인가”

“인류를 위해 못박혀 돌아가신 분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죽은 신을 모셔야 하는가, 우리의 태양신과 달의 신은 살아 있으니 예수보다 더 위대한 신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발레르베 신부가 건넨 성경에 귀를 가져다 댄 아타왈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잖아”라고 소리치며 성경을 집어던졌고 그것을 신호로 건물에 숨어있던 스페인군은 일시에 근위병을 살해하며 아타왈파를 생포합니다.

잉카 마지막 날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바투의 몽골 원정군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뒤 교황은 순식간에 사라진 몽골군의 진위를 알고 싶어 합니다. 교황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프란시스코 회기 욤드루브룩이라는 수도사가 하라호름을 찾아가 뭉케 칸을 알현합니다. 당시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몽골 제국의 절대 권력자이지만 뭉케 칸의 대답이 멋집니다.

“사람들에게는 다섯 손가락이 있다. 너에게 하나님이 있듯이 우리에겐 텡그리가 있다.”

세상의 지배자가 보여준 모습치고는 아량과 위트가 넘칩니다. 아타왈파 잉카가 그런 여유를 가졌더라면 쿠스코의 배다른 형이자 잉카의 패권을 두고 겨룬 와스카르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고 잉카 제국을 구했을 것입니다. 적의 적은 우군이라 했던가요, 그는 포로가 되자 제일 먼저 쿠스코로 밀서를 보내 와스카르와 그의 가족 전부를 죽이라는 명령을 합니다. 피사로는 악당이지만 곧 물러날 것 같아 보여서인가요, 아니면 자기가 포로인 상태에서 와스카르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우려해서인가요, 그런 얕은수를 가졌기에 잉카는 망했고 아타왈파는 후안으로 개종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를 맺었습니다. 반면 피사로는 이 날의 성공으로 잉카를 손쉽게 정복하게 됩니다. 잉카의 이야기를 보면 알마그로는 피사로에게 처형당하고, 피사로는 알마그로의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하고 발베르베 신부는 피사로가 암살당한 후 다음은 자신이라며 잉카를 떠나 파나마로 돌아가는 배에 오릅니다. 그러나 배가 좌초되어 뿌나 섬에서 식인종들에게 잡혀 먹혔으니 주역들은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아타왈파를 포함해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4명의 인물들은 모두 잉카와 함께 그렇게 사라집니다.

대성당에 들어서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이 원본과 다른 하나를 찾으라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림 속의 12제자 중 누가 피사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다를 빼고 자신을 그려 넣으라 했다는데 신은 아니지만 신과 함께할 정도로 성공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성당 모퉁이에는 검은 얼굴의 예수님이 있습니다. 멕시코 과달루페의 검은 마리아 상과 함께 흔히 토착화된 가톨릭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검은 예수님이나 마리아는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믿고 있습니다.

1950년 대지진 때의 일입니다. 7분 동안의 여진이 이어졌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이 검은 예수님을 들고 성당 밖으로 뛰어나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지진이 멈추었다는 진실 아닌 진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성당을 나가려는데 지하 계단이 보입니다. 안내자 사울은 가르실라소 델 라 베가(I.G de la Vega 1539 ~ 1616)가 기도하며 머물던 방이라고 소개합니다. 얼핏 책에서 본 하나의 내용이 떠올라 지하로 잠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녀는 잉카의 황녀와 스페인 군인 사이에서 태어난 여성으로 잉카의 진실을 남기려 ‘잉카에 대한 공식 보고서(Royal Commentaries of the Incas)’라는 책을 하나 남겼습니다. 비록 스페인어로 쓰였지만 잉카인이 쓴 유일한 책이고 그녀가 의도를 가지고 책을 썼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실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이는 수도사들의 기록이 잉카를 설명하기에 부족하거나 많이 왜곡되어 있음을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특별히 지하에 머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비라코차 신전 지하, 자신들이 믿던 신의 성전, 비록 윗부분은 다시 지어졌지만 땅 아래는 온전했으니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잉카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대성당을 나와 산타 까발리나 수녀원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마음이 착잡합니다. 태양의 신 인티를 모시는 신녀들의 집 아끄야와시, 그녀들은 순결한 몸을 지녀야 했으나 스페인의 정복 군들은 그녀들을 겁탈했습니다.

“남미는 스페인의 총과 칼에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잘생긴 스페인 남성들의 정력에 정복당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합니다. 잘생겼다는 말이 책임을 희석시킵니다. 마치 여성들의 동의가 있었다는 뉘앙스 내지 유혹을 상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든 엄청난 인종을 만들어 냈으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씨만 뿌리고 책임을 안지죠, 아끄야와시의 신녀들은 점차 배가 불러옵니다. 그리고 밍꼬 잉카가 일으킨 봉기 때 이번엔 잉카 군들이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신녀들은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강요당합니다.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거나 순결을 잃고 죽음을 당하는 신녀들은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왜 여성들에게만 순결을 강요할까요,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한 순결에 대해 여성들만 책임을 지라고 한다면 많이 억울할 것입니다. 산타 까발리나 수도원은 보호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살다간 여성들의 한이 울렁거리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