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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잉카를 유지하는 힘

제국의 확장기에는 외부 에너지에 의지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땅을 넓히고 외부에서 빼앗아온 전리품이 유입되면 제국은 풍요로워지고 경제는 활발히 돌아갑니다. 링에 오르는 무적의 챔피언도 언젠가는 링을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쓸쓸한 말년을 맞지 않으려면 알맞은 일을 찾아 제2막의 인생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링에서의 삶보다 더 긴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잉카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위대한 파차쿠텍 왕의 공덕이 컸습니다. 그의 후계자들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제국의 확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경찰국가로써의 제국은 땅이 넓어지는 만큼 수입이 증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입이 증가하는 만큼 관리하는 비용도 증가하기 때문에 수입 창출이 멈춰버리면 관리비를 감당하지 못해 서서히 기울게 됩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서서히 썩어가는 것입니다. 잉카 제국은 외부 수입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쳤고 내부에서 그에 따른 대안을 찾게 됩니다. 잉카의 제국은 내부에 어떠한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했을까요? 신의 얼굴을 빌렸던 얕은꾀로는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기본은 풍요를 구현하거나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정복의 시대가 끝나면서 풍요의 시대는 저물었습니다. 이제 결핍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일이 제국의 운명을 가늠하는 시대가 됩니다. 11대 잉카인 뚜박유방끼와 12대 잉카인 와이나까박은 그런 시대의 접점에 선 인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의 지식으로는 그들의 행적을 쫓으며 제국의 운명과 결부시키기에 한계가 있으니 무엇을 규명하기보다 세상 속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여행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잉카의 생산력은 성스러운 계곡의 풍요 속에서 피어납니다. 쿠스코 외곽에 있는 성스러운 계곡의 여행은 삭사이우아망, 푸카푸카라, 땀보마차이, 켄코, 피삭, 살리나스, 모라이, 오얀따이땀보로 이어지는데 BTG라는 한 장의 입장권만 구입하면 모든 탐방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루에 돌아보기에는 너무 많아 이 중 몇 곳을 집어냅니다.

땀보마차이는 오얀따이땀보의 유적지보다 규모가 작으니 땀보마차이는 넘어갑니다.

피삭은 모라이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면서 잉카 트레일을 걷는 동안 지나게 되는 위냐이 와이나 유적지와 기능이 같으니 역시 건너 띄기로 합니다. 켄코와 푸카푸카라는 한 번쯤은 가보고 싶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마음으로만 둘러보기로 합니다.

첫 방문지인 삭사이우아망을 이른 아침에 오릅니다. 삭사이우아망은 산 중턱에 있어 쿠스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전망대이기도 합니다. 삭사이우아망은 파차쿠텍 왕이 건설한 여러 석조 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정교하며 잉카의 정신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유적지 입구에 그려진 상상도로 본 삭사이우아망은 넓은 대지에 3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둥근 탑 형태의 신전이었습니다. 신전 주변에는 부속 건물을 건설해 방어적인 기능을 가진 것 같은 도시 구조입니다. 높이 18m, 길이 360m의 축대는 3단으로 되어있는데, 3단의 축대는 하단부터 지하의 성물인 뱀, 땅의 지배자 푸마, 하늘의 상징 콘도르를 의미합니다. 마추픽추가 신의 세계인 콘도르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삭사이우아망은 인간의 세계인 푸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축대의 모습은 66개의 지점에 지그재그의 돌출 형태를 만들어 날카로운 이빨을 상상하게 하는데 푸마의 이빨을 상징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안내자 사울은 이곳에서 가장 큰 돌 앞으로 저를 데려갑니다. 다각의 돌은 잉카 석축의 특징이라지만 이 돌은 16각에 이릅니다.

‘잉카 인 안데스’에서는 이 돌의 무게가 140톤이라고 하는데 사울은 300톤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잉카 인 안데스’의 저자가 삭사이우아망을 방문한지 10여 년이 지났으니 그 사이 돌이 증식을 한 모양입니다. 여하튼 무게를 재어본 것이 아니니 시시비비는 그만두고 석축을 돌아 상부로 올라갑니다. 삭사이우아망에서 내려다 본 쿠스코의 색은 옅은 붉은색입니다. 붉은 지붕 사이로 어제 돌아본 광장과 코리칸차, 대성당이 보이고 지나쳤던 골목골목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쿠스코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로마가 떠오릅니다. 로마와 쿠스코의 색이 같은 붉은색이라서 일까요? 그보다는 쿠스코가 사랑스러워서인 것 같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합니다. “로마로 신혼여행을 가지 마라, 부인을 잃고 혼자 돌아오게 된다.”

이태리 남자가 잘생기고 매너가 좋아서 여자들이 반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붉은 지붕 위로 기울어가는 석양이 너무 아름다워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유럽에서는 남편을 버리고 로마를 택하는 여자가 많았나 봅니다.

삭사이우아망은 잉카의 패망을 오롯이 지켜본 장소입니다. 아따우왈파의 뒤를 이어 잉카가 된 망꼬 잉카는 자신과 추종자 3천여 명을 풀어주면 선조 잉카들이 안식하는 숨겨진 계곡에서 황금 미라를 가져오겠다고 제안합니다. 순진한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삼척동자도 알만한 뻔한 사실인데 피사로는 허락을 합니다. 망꼬 잉카는 쿠스코 왕궁에서 풀려나자마자 추종자들과 함께 사라졌고 반란 세력을 모아 쿠스코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이 쿠스코를 점령했을 때 아그사와라의 신녀들은 떼죽음을 당합니다.

스페인군과 대립하던 잉카 저항군은 군 사령부를 삭사이우아망에 두었기 때문에 전세가 역전되며 삭사이우아망에서 마지막 혈전이 벌어집니다. 병력의 수는 비교도 안됐지만 철갑을 입은 스페인군의 몸을 잉카의 무기로는 뚫을 수가 없었고 스페인군에게 몰리던 잉카 저항군은 쿠스코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뛰어내려 죽음을 택합니다. 그때 탑 형태의 신전은 마지막 보루였으나 신은 잉카를 보호하지 않았고 결국 신전도 파괴됩니다.

삭사이우아망은 바벨탑의 전철을 밟습니다. 신전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가슴에서 신성이 떠납니다. 그리고 잉카의 신을 대신해 가톨릭 신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잉카인들이 가톨릭으로 마음을 바꾸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은 무기력한 신에 대한 보복인지도 모릅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삭사이우아망에서 돌을 가져다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산토도밍고 성당 등 스페인이 지은 건축물 뿐 아니라 쿠스코의 주민들도 자신들의 집을 지을 때 크고 작은 석재를 삭사이우아망에서 가져다 지었습니다. 바벨탑의 영광이 사라진 후 무너진 벽돌을 주어 집을 지었던 바벨탑의 후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나마 다른 차이라면 돌이 너무 커서 옮기지 못했던 것이 쿠스코에 선물로 남겨졌을 뿐입니다.

안내자 사울은 유난히 이름에 집착합니다. 그의 집착에는 우리의 것이 무시되었다는 일단의 저항의식이 배어 있습니다. 지금은 도시가 확장되며 모두 사라졌지만 잉카시대에는 두 개의 강이 도시를 가르고 지나갔으며, 강변에는 모래가 많았다고 합니다.

건국신화에는 지하 도로를 따라 쿠스코에 온 자매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매는 바닥에 나무를 꽂아 꽃이 피는 곳에 나라를 세웠다고 했습니다. 지금과 달리 잉카시대 쿠스코는 도시가 들어설 만큼 물이 많았고 풍요로운 땅이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쿠스코인들은 강변을 걸을 때면 발을 끌었는데 그때 ‘코스코’라는 소리가 낫다고 합니다. 코스코라는 소리에서 도시의 이름을 따 ‘코스코략다’라 불렀는데 후에 스페인 사람들이 이를 ‘쿠스코’로 바꾸어 불렀다고 합니다. 그 뜻은 스페인어로 ‘Small Dog’라는 뜻을 지녔다고 하니 너희들은 그래봤자 펫이니 까불지 말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원어의 지명을 불러주는 추세이니만큼 쿠스코도 코스코략다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지요? 여기 삭사이우아망도 그런 경우입니다.

케츄아어로는 ‘Stone City’의 뜻이지만 스페인어로는 고기를 잔뜩 먹어 배가 부르다는 뜻이라고 사울은 설명합니다. 그로 인해 절벽으로 뛰어내린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그들은 콘도르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콘도르는 잉카인을 못살게 굴고 하늘 높이 날았으니 스페인의 시각으로 보면 자신들이 믿는 신의 먹이가 된 불쌍한 백성입니다. 신에게 마저 배신을 당했으니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라는 뜻이 내포된 말입니다. 하지만 신이 육신을 물고 하늘 높은 곳으로 날아갔으니 잉카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로 승천한 것입니다.

잉카는 비록 사라졌지만 그들은 하늘 높이 승천해 영원한 것이죠, 삭사이우아망을 돌아 나오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잉카의 문명 단계는 석기 문화 혹은 청동기 문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의하는 이유는 잉카가 철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대륙의 문명은 발전 단계가 뚜렷합니다. 하지만 남미 대륙은 첨단 수학과 과학의 지식을 지녔음에도 철기가 없었고, 바퀴와 화약이 없었습니다. 바퀴의 구조를 알아야 건축에 쓰이는 여러 수학적 공식을 쉽게 알았을 텐데 바퀴 즉, 둥근 물체에 대한 개념 없이 기하학적인 이해가 가능했을까요, 철기가 없는데 어떻게 단단한 화강석을 정교하게 절단하여 다듬었을까요,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야크의 배설물을 넣고 발효시키는 방법을 썼다면 바위에 깊은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석기나 청동기 시대의 도구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철기 도구일지라도 웬만한 강도로는 불가능한 일이니 철기도 단순 철기가 아닌 순도 높은 강철이거나 합금을 알아야만 이에 알맞은 도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도구를 만들었다면 철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무지에서 온 편견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궁금증에 대해 사울은 박물관에 가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이럼 빙엄의 설명 – 나무의 즙으로 돌의 표면을 무르게 하는 비법을 원주민들은 알고 있다. 원주민들이 돌을 부드럽게 하는 액체를 만들어냈다면 그들은 신비의 물약을 만들어낸 과학자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참피(Champi)라 불리는 도구입니다. 참피는 철에 금, 백금을 섞어 만든 합금입니다. 현대에도 돌을 자르는 톱의 날에 백금 또는 다이아몬드 합금을 사용합니다. 현대에나 구현된 지혜를 잉카는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철기를 갖지 못했다는 판단은 너무 섣부른 듯합니다. 스페인이 본 잉카군은 돌팔매를 하고 나무 끝에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촉을 단 창으로 무장한 원시 군대였습니다. 그런 군대를 본 스페인의 시각, 그 이후로 잉카의 역사를 쓴 역사가나 수도사들의 기록에 준한 판단일 뿐입니다. 이에 더해 지식인들의 편견도 일조합니다.

헤겔은 신대륙을 ‘역사 없는 아메리카’라 보았고, 다윈은 스페인의 점령을 미개한 아메리카의 ‘자연 도태’로 판단합니다. 그런 편견들로 덧칠하며 역사가 없는 원시 상태의 대륙, 발전하지 못해 자연 도태된 대륙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런 가정도 가능합니다. 돌과 창, 가죽 방패, 돌팔매가 주 무기였던 그런 군대로 제국을 이루어 주변을 평정할 만큼 남미 대륙은 전쟁이 극열하지 않았던 대륙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은 있었으나 강한 무력이 없는 그런 땅이었기에 화약이나 철기와 같은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와’하고 소리치면 저쪽 편에서도 ‘우’하고 소리치는 그러다 몇 명 나가 싸우는 것으로 승부가 나는 그런 평화로운 민족들이 사는 땅이었으니 무기의 발달이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건너간 대롱 형태의 총이 火繩銃으로 다시 현재 모습의 後裝銃으로 진화를 거듭했던 가장 큰 이유는 유럽의 끝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잉카는 정복 국가였습니다. 주변 부족들을 침공하고 복속시키며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유럽만큼이나 잉카도 많은 전쟁을 치렀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효율적인 전쟁의 도구를 갖지 못했던 것은 잉카는 신석기 문화에 머물러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이룩한 건축과 문명의 잔재는 무엇인가요, 돌로 이루어졌다고 모두 석기 문명은 아닙니다. 돌은 가장 오래 남는 문명의 흔적입니다. 그래서 잉카는 돌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돌을 다루려면 돌보다 강한 쇠가 필요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려면 화약과 같은 물질, 바퀴의 원리와 같은 기하학이 필요합니다.

거대한 석조 건축물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표시가 많이 있습니다. 바퀴의 살과 같이 빛이 퍼져나가는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둥근 물체가 중심축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원리이며 그들이 믿는 두려운 미래이기도 합니다. 바퀴를 못 만든 것이 아니라 신성이기 때문에 피했던 것이 아닌지 추측해 봅니다.

화약도 그렇습니다. 바위를 자르기 위해 야마 배설물의 발효를 이용했습니다. 화학적 반응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화약은 말의 배설물에서 원료를 얻습니다. 야마와 말의 배설물로 팽창하는 가스에 고체화시키는 원리는 같습니다. 배설물의 발효와 팽창의 원리를 알고 있었던 잉카가 화약을 못 만들었을까요,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 역시 불을 뿜는 일이고 이는 신에게만 허용된 일이었습니다.

잉카는 철기도 화약도 바퀴도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신의 영역이라 생각해 단지 이를 지혜로만 가지고 있었을 뿐 실생활에 활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삭사이우아망을 나오며 저는 미스터리라고 치부했던 하나의 편견을 다시 내려놓습니다.

“잉카는 몰랐던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아 철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초기 정복 시기를 지나 잉카가 제국으로써 안정된 운영이 가능했던 이유는 풍부한 농업의 생산율 덕분입니다. 잉카의 생산력의 현장인 모라이 농업 연구소를 찾아갑니다.

남미 대륙의 주식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즈텍과 마야는 옥수수, 고지대인 잉카는 감자, 저지대와 해안의 잉카는 유까입니다. 유까는 돼지감자나 고구마와 같이 생긴 뿌리 식물로 최근 관심이 높아지는 야콘의 한 종류로 분류됩니다. 반면 잉카의 대표 음식인 감자는 만드는 방식에 따라 추뇨(Chuno)와 모라야(Moraya)로 분류합니다. 감자를 씻지 않고 그대로 말리면 검붉은 색을 띠는데 이를 추뇨라 하고, 물로 씻어 말리면 흰색을 띠는데 이를 모라야라고 합니다. 추뇨와 모라야는 감자를 여러 차례 말리고 얼리기를 반복하며 물기를 완전히 뺀 것으로 만들어진 추뇨는 마치 마른 대추와 같이 쭈글쭈글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추뇨는 약 2 ~ 3년간 상하지 않는 상태로 보관이 가능하다고 하니 수확한 감자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잉카는 모든 작물의 30%를 전쟁과 흉작기에 대비해 꼴까(Colca)라는 창고를 짓고 그 안에 보관했다가 흉년에 풀어 백성들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때도 추뇨는 대표적인 보관 작물이었습니다. 감자 다음으로 주요 작물인 옥수수는 저지대에서 주로 경작되는데 옥수수는 마야나 아즈텍의 주식이어서 신성한 작물로 여겨집니다. 마야의 경전 포폴 부(Popol Vuh)에는 옥수수가 마야와 얼마나 밀접한지 보여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며 먼저 진흙으로 빚었다. 그랬더니 비가 오면 진흙 인간은 쉽게 허물어져 실패하였다.다시 신은 나무로 인간을 창조했다. 나무인간은 지능이 떨어지고 신에게 감사하지도 않을뿐더러 몸에 피가 돌지 않아 움직임이 없었다.

신은 다시 나무인간을 없애고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옥수수 즙으로 피를 만들어 넣으니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야의 의식 속에 인간은 옥수수로부터 나왔다고 믿을 만큼 옥수수는 신성한 작물입니다. 실질적으로도 제례 때나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에게만 특별히 제공될 만큼 잉카에서도 귀한 음식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MORAY 1
MORAY 2
잉카와 유럽의 팽창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준 모라이 농업연구소

옥수수와 감자는 남미 대륙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이 세계의 주인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유럽은 항상 식량난에 허덕였고, 유럽을 지배하는 민족들은 게르마니아라 불리는 북방 민족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기온이 상승하고 안정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게 됩니다. 1만 년 전부터 지속되는 간빙기의 거대한 흐름 속에 여러 번의 소간빙기가 찾아왔고 그럴 때면 지구촌에는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가 쳤습니다. 그중 하나가 게르마니아의 남하로 시작된 인류사의 대격변입니다. 인구가 팽창한 반면 경작지가 협소해 먹을 것을 찾아 떠나는 민족 대이동의 원인이 됩니다. 로마를 명망의 길로 이끈 것도 민족 대이동입니다. 이후로도 유럽은 척박한 기후가 계속됐고 부족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13세기, 유럽을 공략한 바투의 몽골 서역 원정대는 가져갈게 없다고 판단하고는 말머리를 돌립니다. 빽빽한 숲에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허름한 마을만이 있을 뿐 제대로 된 도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이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입니다. 그러나 감자와 옥수수가 전래되면서 유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유럽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때마침 인구가 폭증했고 이때에 맞춰 남미 대륙에서는 감자와 옥수수가 전래됩니다. 옥수수는 척박한 유럽의 기후에 더욱 잘 자랐고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양을 재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노동 대비 생산량이 가장 좋은 작물입니다. 이런 옥수수와 감자의 특성은 남미의 거친 자연환경에서 제국을 일구어내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며 유럽이 세계의 주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여했습니다. 옥수수는 노동 생산성이 높아 1년에 50일의 노동만으로도 다른 작물에 비해 월등한 수확량을 가져다줍니다. 다시 말해 심어만 놓으면 알아서 자라니 남는 시간에 국가 건설 산업에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옥수수와 감자의 생산성이 잉카와 아즈텍의 문명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럽도 메마른 땅에 잘 자라고 단위 생산성이 높은 옥수수와 감자 덕에 팽창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세기 유럽의 인구는 인구 대국인 프랑스가 1,500만여 명이었지만 영국은 200만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동시대 아즈텍은 2,000만여 명, 잉카는 1,500만여 명이었습니다. 옥수수와 감자를 활용한 문명권과 그렇지 못한 문명권의 차이입니다. 옥수수와 감자가 유럽으로 흘러들고 300년이 지나 유럽의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분포는 20세기 초까지 이어집니다. 쌀농사에 의존했던 아시아권의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 이슬람권에 비해 비약적인 증가였고 인구를 고려하면 이슬람권이나 아프리카 흑인, 아메리카의 인디오를 능가하는 수입니다. 그런 급격한 인구 증가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유럽의 힘이었으니 남미의 감자는 유럽을 구했고 유럽의 천연두는 남미를 망가뜨렸다는 자조 섞인 말이 하나도 어긋나 보이지 않습니다.

잉카와 유럽의 팽창을 가능하게 한 모라이 농업 시험장, 이곳에서 잉카는 2,800여 종의 감자를 개발했습니다. 작물의 생산성은 제국의 생명이기 때문에 잉카는 고도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심어 생산성을 높이려 했습니다.

작물 시험장은 70m 계곡 아래로 둥근 계단 층을 그리며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험장을 둥근 웅덩이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바람의 영향을 받아 결과가 왜곡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아주 정밀한 결과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시험장 각 단의 높이는 1.5 ~ 2m 정도이고, 각 단의 높이에 따라 0.5도의 온도차가 난다고 합니다. 안데스 산간지대는 온도와 기후가 작물 재배에 적합하지 않아 생산성이 많이 떨어졌지만 모라이에서 잉카는 그 해법을 찾았고 잉카의 과학적인 결과는 멀리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유럽의 팽창은 잉카의 금이 아니라 잉카의 곡물이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농업 시험장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받이와 물이 내려갈 수 있도록 아래층까지 돌계단이 돌출되어 있습니다.

농업 시험장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데 중간 지점에 여행객의 진입을 금지한다는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걸어 내려갈 수 있었다는데 그 사이 탐방객이 늘었는지 유적 보호를 위해 허가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농업 시험장의 하단부 중심에는 물이 빠질 수 있도록 돌로 만든 구멍이 있습니다. 그곳은 여행객들 사이에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는 말이 돌아 모두들 둥글게 모여 앉아 기운을 흡입했다고 합니다. 또한 둥글게 모여 앉아 손뼉을 치면 지하로 음이 퍼져나가 계곡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고 하니 마야의 에코 시스템을 잉카에 공유했나 봅니다.

 모라이는 3,800m에 이르는 고원에 위치합니다. 모라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마라스 살리네라스(Maras Salineras)라고 불리는 잉카의 염전이 있다고 하여 찾아갑니다.

염전으로 가는 길은 작은 마을을 지나가는데 잉카 시대부터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주 작고 소박한 마을입니다. 마을로 들어서면 장대에 비닐 주머니를 씌운 집이 여럿 나타납니다. 우리네로 보면 동네 맥주 가게입니다. 잉카인들은 치킨 대신 말린 옥수수 알을 놓고 전통 발효주 치차 모라다(Chicha Morada)를 마십니다. 막걸리와 같이 걸쭉하게 발효된 술은 도수도 높지 않고 달짝지근한 것이 한잔하기에 적당합니다.

안내자 사울은 기왕이면 파란 비닐이 걸린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파란 비닐은 아가씨가 술을 파는 집이고 빨간색의 붉은 비닐은 결혼한 여자가 술을 팔고 있다는 표시라고 합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못 이기는 척 파란 비닐이 걸린 집으로 들어갑니다.

살리네라스는 계곡에 자리를 잡은 염전이라 내리막길에 차를 세우고 사진 한 장을 남깁니다. 그리고 촘촘히 판을 업어놓은 것 같은 염전 길을 걷습니다.

알티플라노는 1,800년경에 일어난 안데스의 융기로 많은 바닷물이 갇혔습니다. 땅이 솟아오르며 기판이 깨지고 옅어진 틈으로 화산이 분출하여 바닷물이 화산재에 뒤섞이고 천천히 굳었습니다. 그 결과로 알티플라노, 아따까마, 이까 지역에 여러 독특한 지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살리네라스는 그때 만들어진 소금산 아래로 흐르는 지하수가 염수로 변하여 계곡에서 솟구친 염전입니다.

잉카는 이 물을 받아 소금을 생산하였고 현재에도 잉카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소금 도랑을 걸어가면 염전이 끝나고 소금 창고가 모습을 보입니다.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수입니다. 소금은 때때로 금만큼이나 비싼 값에 팔렸고 소금으로 부를 축척한 고대 왕국이 많았습니다. 로마는 병사들의 임금을 소금 자루를 주었을 만큼 소금은 태환성을 갖은 귀중품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소금 부족으로 부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몽은 소금산에서 소금을 구해와 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소금이 없으면 개인은 물론 제국도 없으니 소금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은 인류사에서 처절합니다.

잉카는 모라이에서 식량을 얻고 살리네라스에서 소금을 얻었으니 광대한 제국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살리네라스 계곡을 따라 1시간을 걸어 내려가니 우루밤바강을 건너는 다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작은 마을 한 편에는 스페인 풍의 대저택이 있습니다.

오늘의 점심상이 차려진 투누파 레스토랑(Tunupa Restaurant)입니다. 앞으로는 강이 있고, 잘 가꾸어진 정원 앞에는 건물로 이어지는 계단과 계단 사이에 꾸며진 화단을 지나면 콜로니얼 풍의 2층 건물이 나옵니다. 음식을 놓고 따사로운 햇빛을 즐기니 여러 상념이 생깁니다. 이 지역을 몽땅 지배한 어느 가문의 집에 속한 보잘것없는 소작인, 그의 아들은 대저택의 정원을 가꾸다 말고 건물 뒤로 뛰어갑니다. 2층 베란다에서 머리를 말리는 예쁜 주인집 딸도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건물 뒤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주인집 딸은 세비아로 유학을 떠나고 소작인의 아들은 병이 깊어집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계속 같은 말을 합니다. “안 돼, 그건 안 되는 일이야” 작은 마을에 큰 집이 덩그러니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혼자 독차지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행 중 이렇게 분위기 있는 집에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니 그만 따지고 아름다움과 여유를 즐깁니다. 소작인의 아들은 결국 살리네라스의 소금을 발견하여 주인집 딸과 맺어졌다는 상상을 하며..

MARAS SALINERAS
잉카의 염전, 마라스 살리네라스

 오늘의 숙박지인 오얀따이땀보에 들어오면 가파른 산자락에 걸린 여러 유적지와 만나게 됩니다.

두 개의 산에 걸린 유적지를 오얀따이땀보라고 하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큽니다. 땀보는 창고를 의미하기도 하고 잉카의 길을 운영하는 역참이나 군사적 시설물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도시가 아닌 신흥 도시는 이렇게 생겨납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던 유럽의 도시들은 로마 군단이 머문 자리였습니다. 그런 도시로 파리, 베른, 런던이 있다고 합니다.

군단이 머물면 몇 만여 명의 병사들을 위한 군속이 따라붙고, 군수품을 조달하는 상인이 모여들고 군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장사치들까지 그러다 보면 윤곽이 생기고 결혼해 정착하는 병사들이 생겨납니다. 결국 아무것도 없던 들판이 번잡하게 변합니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도시로 발전해 갑니다.

오얀따이땀보 역시 거대한 성을 축조하고 창고엔 식량이 가득하니 창고의 식량을 지키는 군인, 식량을 운반하고 유통시키는 상인, 주변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과 관리인들까지 번잡하게 사람들이 오가며 도시로 성장한 그런 곳입니다. 특히 오얀따이땀보엔 역사적인 슬픔도 있습니다.

망꼬 잉카는 첫 봉기 후 삭사이우아망에서 스페인에 패하고 이곳으로 저항군을 퇴각합니다. 뒤쫓는 스페인군을 맞아 도시 앞에 흐르는 바따깐차강의 물을 막고 기병대가 강을 건널 때 수고를 터뜨려 대승을 거둔 곳입니다. 두 개의 산이 마주해 들어오는 입구가 좁고 방어하기 좋은 강과 성이 있었건만 망꼬 잉카는 아마존으로 후퇴한 후 전력을 정비해 다시 스페인을 공격하겠다는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우루밤바강을 따라 아마존 입구인 비스코르로 근거지를 옮깁니다. 어느 백성이 왕국의 가치와 문화, 심지어 백성이 있는 땅을 떠난 왕조를 지지할까요, 주력군이 와해되고 백성마저 없는 아마존에서 잉카는 몇 대에 걸쳐 빌까밤바 시대를 이어가지만 결국 아마존을 벗어나지 못하고 스페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잔존 세력들은 아마존 안으로 깊숙이 숨어듭니다. 아마존에 존재한다는 엘도라도의 황금 전설을 남긴 채…